기획 완결 패전속승리학

<63>소련의 아프칸 침공

입력 2006. 11. 14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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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년대 동서 간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소련군 재래식 전력은 서방에 심각한 위협이자 수수께끼였다.

    방대한 유럽 전장을 상정해 대규모 종심작전과 제파식 전술을 추구한 소련군은 매우 강력한 전력을 구축한 것으로 보였지만 위력을 검증할 실전 사례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소련군의 능력에 대해서는 양 극단의 억측이 난무했다.

    이런 소련군에 79년 새로운 실전기회가 찾아왔다. 78년 쿠데타 이후 친소 사회주의 국가로 돌아선 아프가니스탄에서 신임 대통령 아민이 내정 안정에 실패하고 중국에 접근하려는 움직임마저 보인 것이다. 소련은 새로운 위성국 아프가니스탄의 이탈을 막기 위해 68년 ‘프라하의 봄’ 진압과 마찬가지로 군사개입을 선택했다.당시 소련은 이미 치안 보조를 빙자해 수도 카불 등지에 KGB의 특수부대(오스나즈)와 육군 특수부대들을 위장 잠입시켜 놓은 상태였다. 이들이 카불 시내의 주요 목표를 탈취함과 동시에 3개 기보사단, 1개 공수사단을 주축으로 한 40군이 육로와 항공편으로 진입할 계획이었다.

    아민을 제거하고 신정부를 수립, 함께 치안을 안정시키면 3년 내 주력을 철군시킬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었다.이 기습작전은 79년 12월 27일 저녁에 개시됐다. 예상대로 우수한 소련군 특수부대들은 밤새 목표를 달성했고, 40군 소속 병력들도 거침없이 내달려 아민 정부를 전복시키고 전국 주요거점을 장악했다. 이는 서방국가들에 소련군의 우수한 특수작전과 기동작전 능력의 대성공으로 비쳐졌다.하지만 이것은 지루한 전쟁의 시작에 불과했다. 부족·종교 수호정신이 투철했던 아프가니스탄 민중들은 무자헤딘(전사)이 돼 미국의 스팅어 미사일과 같은 강력한 무기 원조를 받으며 끈질기게 소련군을 괴롭혔다.

    소련군 주력 기계화보병은 궤도식 보병전투차(BMP)나 차륜식 장갑수송차(BTR)와 밀접히 연계된 제파기동 훈련만을 받아 산악전에 둔중하고 무력했다.결국 소련군은 혈전 속에서 더디게 새로운 용병술과 편제를 도입해 갔다. 우선 기존에 무리한 제대별 작전종심을 추구하다 보니 균형을 잃었다는 반성이 제기됐다. 기계화보병은 수색부대의 협격 기동과 조응하는 도보기동을 익혔고, BMP와 BTR는 따로 모아 브로네그루빠(기갑조)라는 예비기동화력으로 운용됐다.

    독립작전능력과 기동력을 겸비한 부대 편제도 다수 실험돼 독립기보여단과 독립기보대대는 물론 독립기보중대까지 운용됐다. Mi-24와 같은 중무장 헬기와의 공지 협동전술 또한 발전이 있었다.이를 바탕으로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인 130만 명을 희생시킨 치열한 토벌전을 벌였지만 치안 회복에 실패했으며 주둔은 예정된 3년을 훨씬 넘겼다. 미국을 등에 업은 반군의 저항의지와 내전 이면의 복잡한 대결 환경을 과소평가한 결과였다.

    소련군은 전쟁 중 6만8000여 명의 사상자 외에도 40만 명이 넘는 병사가 질병에 시달림을 당하다 89년 2월 15일 쫓기듯 철군을 완료했다. 고전 끝에 얻은 귀중한 전훈도 연이은 소련 해체와 함께 상당수 묻혀 버렸다.냉전기 3차 세계대전을 대비해 조직된 거대한 소련군은 그들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아프가니스탄 전장 환경에서 수렁에 빠져 녹아났다. 변화의 조짐을 읽지 못하고 몸집만 불리다 적응에 실패한 공룡 같은 조직의 참담한 말로는 군사조직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채승병 전사연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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