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패전속승리학

<62>바르바로사 작전과 선제타격

입력 2006. 10. 31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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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적대국의 대치 상황에서 어느 쪽이 먼저 행동에 나서 주도권을 잡느냐의 선택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북한의 핵실험 여파로 한미 연합 위기 대응체제 점검이 강조되고 있는 현재 선제 타격(preemptive strike) 가능성에 대해 세인들의 지적이 이어지는 것도 당연한 추세다.
    군사사(軍事史)에서 가장 대규모 선제 타격이 논의된 사례로는 단연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계획인 바르바로사 작전 이전의 대치상황이 꼽히고 있다. 독일·소련은 39년 8월 불가침조약을 맺고 폴란드·발트3국 등을 대거 분할 점령했으나 파시즘과 공산주의라는 이질적인 이념에 기반을 둔 양국 관계에는 깊은 불신이 도사리고 있었다.
    특히 40년 프랑스가 독일에 단시간에 무릎을 꿇자 소련은 독일군의 위력에 경악하며 전쟁 대비 태세를 강화했다. 소련은 38년 이래 고수해 온 선(線)방어형 국경방어체제의 종심방어로의 전환을 서둘렀고, 군수산업 증산을 가속화했다. 질적·양적으로 독일에 비해 우세하던 전차 배치도 대규모 기계화군단으로 재편하며 집중 운용을 도모했다.
    비슷한 시기 히틀러는 40년 12월의 총통훈령 21호를 통해 독립적으로 독일군의 소련 침공준비를 지시했다. 41년 초부터 300만 명이 넘는 독일군과 추축동맹군이 소련 국경지대에 서서히 집결하기 시작하자 소련의 정보기관에서는 심상치 않은 독일군의 동향을 연이어 보고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전쟁이 임박했다는 징후을 감지하면서도 독일군의 공격 시점과 소련군의 대응 방향 결정에 주저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과 같은 양면 전선의 위협을 덜고자 영국을 굴복시킨 42년 이후에나 소련 침공에 나서리라 예상했다. 따라서 그 이전에 소련군이 충분한 전력을 집결하고 선제 공격에 나서 전략적 주도권을 잡으면 된다고 믿었다.
    결국 바르바로사 작전에 맞서는 소련군의 배비는 기형적이 돼 갔다. 39년 동유럽 병합 이후 200~300㎞나 서쪽으로 이동한 새 국경지대에는 아직 충분한 방어 시설과 비행장이 없었음에도 주요 2개 축선에 대규모 전력이 전진 배치됐다. 더 큰 문제는 선제 공격 계획이 구체적으로 확정되지 않았음에도 예비 방어계획이 사실상 전무했다는 점이었다. 공격을 염두에 둔 전진 배치는 역으로 적이 선제 공격을 감행했을 때 아군이 쉽게 적의 포위망에 갇힐 위험도 증가시켰지만, 스탈린 영도체제 하에서 군인들은 침묵을 지켰다.
    그 대가는 참담했다. 41년 6월 22일, 스탈린의 예상을 깨고 추축동맹군이 전면 공격에 나서자 전 소련군은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일선 부대들은 예비 진지와 퇴각시 재편계획·병력 동원 집결지 등이 전혀 지정되지 않은 채 거점 사수와 맹목적 반격 명령 속에 궤멸했다. 그해 말 모스크바 코앞에서 간신히 독일군을 저지할 때까지 소련군은 포로만도 240만 명 이상이었고 사상자는 정확한 집계조차 불가능했다. 적절한 방어 계획에 의해 운용됐으면 훨씬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을 막대한 전력이 어이없이 붕괴되고만 것이다.
    선제 타격은 외교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대치 상태가 고조될수록 매력적인 카드로 보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 배경에 탄탄한 방어 태세가 전제된 상황에서 단기간에 공격 태세로 이전해야 함이 기본이다. 독소전 직전의 막후 역사는 평화의 무드 속에서도 낙관적인 시간표에 근거한 느슨한 준비가 패배를 넘어 국가적 위기를 초래하는 큰 함정임을 다시금 일깨워 주고 있다.
    <채승병 전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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