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戰史속살신성인

<24>이순신

입력 2005. 12. 16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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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멸의 신화 창조한 민족의 성웅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으니 죽을 힘을 다해 싸우면 오히려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임진왜란시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 해상권을 상실한 최악의 상황 하에서 삼도 수군통제사로 재기용된 이순신이 명량 해전을 앞두고 선조에게 한 말이다. 1592년 9월15일 이순신은 12척의 전선으로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의 정신으로 명량 해전에서 왜선 133척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적선 31척을 격파하고 제해권을 회복했다.
    우리 민족 사상 많은 순국선열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분으로 충무공 이순신을 꼽을 수 있다. 충무공은 50여 평생을 사리사욕을 탐하지 않고 오직 국가에 헌신했다. 특히 임진왜란으로 민족이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결사 항전으로 승리를 쟁취해 국가와 국민을 지켜 냈다.
    당시 조선은 왜의 침략 가능성을 두고 국론이 분열돼 이에 대한 구체적인 방책을 세우지 못하고 무방비 상태로 임진년에 왜군의 침략을 받았다. 임진왜란이 발생한 지 20여 일 만에 수도가 함락되고 전 국토가 초토화됐을 때 오직 해상에서 이순신 장군만이 왜적의 침략이 있을 것을 대비, 비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해상에서 전승을 거두며 왜군의 군수품 지원을 차단, 조선 침략 전략에 차질을 빚게 함으로써 나라를 구할 수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413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순신 장군은 우리의 가슴속에 생생히 살아 숨쉬고 있다. 불굴의 용기와 뛰어난 통솔력, 전술가로서의 능력은 군인의 사표로 전혀 부족함이 없다.
    또 ‘난중일기’를 보면 가족에 대한 사랑이 절절히 묻어날 만큼 인간적인 면모를 지녔으면서도 남 앞에서 절대 내색하지 않는 엄격한 자세를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이 훌륭한 점은 먼저 임진왜란을 예측, 철저히 대비책을 강구했다는 점이다. 율곡(이이) 선생이 왜군 침략에 대비,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지만 조정은 국론이 분열돼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시기에 이순신 장군은 지혜와 노력으로 군사를 불러 모아 훈련시키고 전쟁을 대비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또 아무도 생각지 못한 철갑선 거북선을 발명하는 과학적 사고와 창조 정신도 배울 부분이다. 거북선은 세계 선박 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철갑선으로 실전에서 맹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 장군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충무공은 또 해전뿐만 아니라 육전에도 걱정을 많이 했다. 아군이 고전해 온 왜군의 신무기를 노획·분석해 조총을 만들어 냈는데 그 성능이 왜적보다 몇 배 더 우수했다고 한다.
    나아가 최후의 순간까지도 국가의 안위를 걱정한 군인 정신이야말로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이다. 노량 해전에서 적탄이 공의 왼쪽 겨드랑이를 관통, 선상에서 쓰러졌지만 장자 회와 조카 완에게 “방패로 내 앞을 가려라”고 말했다. 이는 장군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않기 위함과 부하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으로 목숨보다 국가의 안위를 더 중시한 것이다.
    이와 같이 충무공의 정신이야말로 참군인 정신의 표상으로 그가 오늘날까지 구국의 성웅으로 추앙받는 까닭이다.
    조선 최고의 병법 전문가인 이순신 장군은 억울한 모함을 받아 백의종군까지 하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끝내 국가를 지켜 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이 있듯이 충무공 이순신은 용(勇)과 지(智)가 출중하고 고매한 인격과 인품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왜군의 침략을 용맹과 뛰어난 지략으로 물리쳤다. 죽어 가면서도 나라의 뒷일을 걱정한 이순신 장군이야말로 민족의 진정한 영웅으로, 이러한 위국헌신의 자세는 영원히 계승돼야 할 살신성인의 표본이다.
    <중령 이준희 공군교육사령부·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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