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세계의명장

세계 명장 열전<65>아서 웰즐리 웰링턴 공작(영국) -상-

입력 2003. 12. 04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0:23
0 댓글
  • 아서 웰즐리 웰링턴 공작(사진)은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 1세를 격파해 영국을 승리로 이끈 정치가 겸 장군이다.

    워털루 전투는 벨기에 브뤼셀 남쪽 13km 지점 가로·세로 10km·4km 넓이의 전투장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과 웰링턴과 프러시아 블뤼허 장군 휘하의 연합군이 싸워 나폴레옹군을 굴복시킨 전투다.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패배함으로써 1792년 시작된 프랑스 혁명전쟁에서 1803년 나폴레옹 전쟁으로 이어진 23년간의 긴 전쟁이 막을 내렸다.

    워털루 전투 도중 나폴레옹의 엘바 섬 유배로 11개월 간 휴전이 있었으나 그가 권력에 복귀한 후 2차 전투에서 최종 패배했다.

    웰링턴은 영국·프러시아·네덜란드·벨기에·러시아 등 연합군 사령관 역할을 맡았다. 그는 워털루 전투를 승리로 이끎으로써 프랑스를 유럽 제국으로 건설하려던 나폴레옹의 야망을 꺾고 그를 권력에서 영구 추방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영국 영웅이 됐다.

    웰링턴은 나폴레옹과의 워털루 전투를 치르기 오래 전부터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군사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우뚝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정치가 겸 군인으로서의 명성은 군사적 혁신과 현대전쟁 전략·기술에 통달했기 때문이 아니다. 영국 제국과 전체 유럽에서 군사지도자로서의 그의 명성과 성공은 독창적 기동전과 포사격 지원, 그리고 지형지물의 효율적 이용을 결합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영국 역사상은 물론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군사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명성을 얻게 된 사건은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군을 굴복시킨 승리였다.

    웰링턴은 1769년 5월1일 더블린에서 영락한 영국과 아일랜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귀족학교인 이튼 학교를 다닐 때 사람들에게 장래성 면에서 그리 뚜렷한 인상을 주지 못했다. 가족들과 학교 선생님들은 어릴 때 평소 느림보였던 그를 바보 취급했다. 그러나 그는 생각한 바 있어 자기 적성을 알고 군인의 길을 선택했다.

    웰링턴은 군에서 자신의 적성과 능력을 발휘, 유명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마침내 앵거에서 프랑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당시 관례에 따라 16세 되던 해 소위 임관증을 돈을 주고 사서 제73보병연대에 배치됐다.

    웰링턴은 군인으로서 능력이 아니라 계속 높은 계급을 사들여 진급을 거듭했다. 그는 25세 때 33보병연대를 중령 계급장을 달고 지휘했다. 그는 군에 들어간 지 10년이 지났지만 단 한번도 전투를 해보지 못했다. 그는 10년 동안 군인이면서도 당시 관례대로 아일랜드 의회의원으로서 사회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웰링턴은 1793~95년 3년간 네덜란드와의 전쟁 때 비로소 적군이 발사하는 총성을 들을 수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웰링턴의 상사들이 비록 적과의 일련의 전투를 어설프게 조직하고 치졸하게 지휘했지만 그는 이때 용감하고 유능한 군인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요크 공작을 비롯해 상사들의 부적절한 지휘와 불필요한 병력손실이 지겨워 일선에서 영국으로 돌아와 한때 새로운 직업을 물색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뾰족한 수가 없자 그는 군대로 복귀한 후 연대를 이끌고 인도로 건너갔다. 웰링턴은 이때 훌륭한 군인이 되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 쏟기로 굳게 결심했다. 그가 평소 즐기던 술과 도박을 끊은 것도 이런 결심과 연관된 것이다.

    웰링턴은 인도에서 승승장구 승진을 거듭했다. 그의 이런 고속승진은 부분적으로는 당시 인도 총독이었던 그의 형 리처드가 밀어준 덕택도 있었다. 리처드는 웰링턴을 계속해서 직책과 책임이 높은 자리로 끌어올렸다. 웰링턴은 이런 족벌적 시혜 덕택으로 높은 자리에 올랐지만 인도의 격렬한 저항운동을 효과적으로 물리침으로써 지휘관으로서 합당한 능력을 보여준 것도 사실이다.

    웰링턴은 1799년 세링가파탐에서 미소르 술탄(왕)과 싸워 그를 패배시켰다. 4년 후에는 7000명의 병력과 22문의 대포만 가지고 아사예에서 100문의 포 지원을 받은 4만 명의 마하라타스 인도 대군과 싸워 이겼다.

    그는 45세 때 스페인에서 귀국, 전국적인 환영과 영예를 한몸에 받았다. 그에게는 황금과 드넓은 봉토와 웰링턴 공작 작위라는 물질과 명예의 보상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남북전략연구소장 여영무 www.libertyclub.org〉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