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피로맺은우방

<9>1953년 7월 27일 조인

입력 2003. 11. 20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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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군경력을 통해 이처럼 수치스럽고 하기 싫은 서명을 해본 적은 없었다.”

    클라크 장군이 유엔군 최고사령관으로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나서 개탄하며 한 말이다.

    1953년 7월27일! 이날은 3년 여 간 끌어온 6·25전쟁을 멈추게 한 정전협정이 체결된 날이다.

    그러나 이 협정은 전쟁에서 벗어나 완전한 평화를 이룬 협정이 아닌 또다른 대립과 갈등, 그리고 새로운 전쟁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불완전 협정’이었기 때문에 클라크 장군이 수치스럽게 생각한 것이다.

    클라크 장군은 정전 30년인 83년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에서도 다음과 같이 술회한 바 있다.

    “유엔군은 거의 다 승리해가는 입장이면서도 조기정전을 바라는 미 국민과 유엔 일부 국가들의 요구에 밀린 워싱턴 당국이 증원군 파견과 만주폭격을 주저했기 때문에 승부없는 모양의 정전으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한국 정부와 국내 여론은 ‘정전 결사반대’ 분위기였다.

    51년 6월23일 유엔 주재 소련대사 말리크(Malik)가 ‘평화의 대가(代價)’라는 연설을 통해 정전회담을 제의하자 이틀 후 미국과 중국이 이 제안에 동의하면서 2년 여의 정전협상이 진행됐고, 결국 53년 7월27일 국제법적으로 전쟁을 완전히 종결하지 못한 채 불안정한 정전협정으로 마무리한 것이다.

    정전협정은 말 그대로 전투행위의 종식을 가져다 주었지만 분단과 대립이라는 전쟁 이전상태로의 회귀에 다름 아니었다.

    북한 공산군의 무력남침으로 조성된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서 우리 국군의 처절한 방어, 그리고 세계 자유진영의 결속과 참여로 침략군을 물리치고 38선을 대체한 새로운 군사분계선(MDL)을 긋게 된 사실상의 원상회귀였고, 한반도의 분단과 공산세력의 위협은 지속되게 된 것이다.

    정전협정이 안고 있는 이와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6·25전쟁은 겨레의 자주독립과 민족사적 정통성을 지켜낸 위대한 국난극복의 대역사(大役事)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전쟁을 통해 고조된 전국민적 안보의식은 오늘날 총력안보태세 구축 및 한·미동맹에 기초한 연합방위태세 완비를 위한 물적·정신적 기반을 이루었던 것이다.

    <국방부 군비통제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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