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피로맺은우방

<8>중공군 포위망 과감히 돌파

입력 2003. 10. 23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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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 제1해병사단 : 전사 718명, 후송 후 사망 98명, 실종 192명, 부상 3504명의 전투 손실과 비전투 손실 3659명(대부분 동상)”
    “중공군 : 전사 2500여 명, 부상 1만2500여 명.”

    1950년 11월27일부터 12월11일까지 장진호에 배치된 미 제1해병사단이 중공군 7개 사단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된 극한 상황에서 ‘죽음의 계곡’으로 명명된 ‘유담리-덕동령-하갈우리-고토리’ 통로를 따라 2중, 3중으로 형성된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한 소위 ‘장진호 전투’에서 발생한 쌍방 피해 결과다.

    장진호는 개마고원에 있는 해발 1000m가 넘는 산악지역으로 당시 낮에는 영하 20도 밤에는 영하 32도까지 떨어지는 살인적인 추위가 계속됐다. 병기는 얼어 붙고 특히 방한피복이 절대 부족해 쌍방 군대 절반 이상이 심한 동상에 걸렸다.

    이러한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미 제1해병사단은 단순한 철수가 아닌 ‘새로운 방향으로의 공격’(an attack in another direction)이라는 스미스 사단장의 강철같은 의지 아래 과감한 돌파작전을 전개, 함흥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로 중공군의 함흥지역 진출이 2주일이나 지연됨으로써 동북지방으로 진격하던 국군과 유엔군 부대들이 흥남으로 집결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됐으며 곧이어 개시된 흥남 철수작전도 가능케 됐다. 특히 중공군 제9병단은 이때의 피해로 3차공세에 참여하지 못해, 3차공세는 후속병력 부족으로 전과를 확대하지 못하고 수원 일대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반면 한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의 기틀을 마련, 이후의 전장에서 다시 주도권을 갖게 됐다.

    장진호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은 참전용사들은 몸서리치도록 처절했던 당시 상황을 꿈에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은 83년 4월 6000여 회원으로 구성된 생존자협회를 결성, 그 명칭을 장진호 전투에서 아주 적게 살아 남았다는 뜻을 담고자 ‘Chosin Few’라고 붙였다.

    ‘Chosin Few’는 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52개 지부를 두고 전쟁포로 문제와 동상 후유증 치료 등에 관해 자문을 받고 있다. 또 박물관을 건립하기 위해 모금운동을 벌이고 한국 재방문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일부 회원들은 그날의 생생한 기억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책을 펴냈다. 수기는 소총수로 참전한 마틴 러스의 ‘포위망 탈출’(Breakout), 장교였던 조지프 오언의 ‘지옥보다 더한 추위’(Colder than Hell), 소설은 장교 출신 제임스 브래디의 ‘가을의 해병’(The Marines of Autumn) 등이 있다. 이 책들을 소개한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보면 “밤새 통곡하며 읽었다”는 ‘Chosin Few’ 회원과 가족들의 독후감이 많이 올라 있다.

    50여년 전 우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살을 에는 눈보라 속에 쓰러져간 용사들과 처절했던 당시 기억을 간직한 채 대한민국의 발전을 지켜보고 있는 ‘Chosin Few’ 회원들의 고귀한 희생을 떠올리며 그 분들에 대한 감사, 그리고 자유의 소중함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국방부 군비통제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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