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태준 조명탄] 해군 추리닝

입력 2022. 01. 18   16:19
업데이트 2022. 01. 18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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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태 준 변호사·작가
배 태 준 변호사·작가


나는 옷을 잘 입지 못한다. 단순히 매칭을 잘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반바지, 긴바지 정도의 차이만 알 뿐, 어떤 옷이 어느 계절에 맞는지도 구분하지 못해서 타박을 종종 듣는다. 옷뿐만 아니다. 전체적으로 상품을 보는 눈이 없고, 잘 고르지도 못하다 보니 쇼핑에도 관심이 없고, 잘 하지도 않는다. 요즘 대세라는 라이브 커머스나 새벽 배송을 이용해 본 경험도 별로 없다.

21세기에 어울리지 않는 구닥다리 아저씨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름대로 장점도 있다. 제품 하나를 사면 기능을 다 할 때까지 정말로 오래 쓴다. 주변에 십수 년 이상 된 물건이 아직도 많다. 남들이 볼 때는 저 낡은 것들을 계속 써도 되나 싶은 것들도 내게는 많은 시간과 추억이 배인 동반자들이다.

칼럼 연재가 결정된 후 가장 먼저 군대에서 받은 물건들이 떠올랐다. 영천 육군3사관학교에 입소한 첫날부터 방위사업청에서 군 복무를 마칠 때까지 받은 배급품 중에 무엇이 아직도 내 곁에 있을까?

지금도 가장 유용한 것은 단연 슬리퍼다. 첫날 배급받은 슬리퍼는 영천, 진해, 계룡, 용산뿐만 아니라 내 직장들까지 따라온, 요즘 말로 내 ‘최애템’ 중 하나다. 미국에서 유학을 할 때도 챙겨갔으니 나름 해외파이기도 하다. 사제 신발들의 수명이 그렇게 길지 못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살면서 만난 어떤 신발보다도 내 삶을 가장 오래 지켜주었을 것이다. 심지어 지금 이 글을 쓰는 내 발밑에도 군대 슬리퍼가 놓여 있다.

파란색 해군 추리닝도 있다. 장점이 많은 옷이다. 무엇보다 정말 따뜻하다. 진해에서 함정을 타고 연수를 나갔을 때나, 겨울철 BOQ에서 쉽사리 들지 못하는 잠을 청할 때도 유용했다. 제대하고 나서 결혼하기 전까지는 집에서도 잠옷처럼 입었다. 결혼 후에는 아내가 철별로 잠옷들을 사주기는 했지만, 지금도 날이 추울 때 출장이나 여행을 갈 때면 숙소 안과 밖에서 모두 입을 수 있는 해군 추리닝을 종종 챙겨서 다닌다. 고무줄이 조금 늘어난 것 빼고는 아직 상태도 괜찮은 편이다.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기술력 하나는 인정해주고 싶다.

첫날 지급 받은 국방색 세면백도 지금까지 종종 내 곁을 지켜주는 벗이다. 손가방을 따로 사지 않은 관계로 가끔 출장을 갈 때 군대에서 받은 세면백을 가지고 갈 때가 있는데, 그 안에 군번과 이름이 적혀 있는 종이를 보면 실소가 나올 때가 있다. 가끔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는 분들이 계시지만, 쓰는 사람만 편하면 되는 거지 뭐.

3년하고 9주 동안의 군 생활을 되돌아본다. 하루가 참 길게 느껴졌다. 처음 훈련소 때는 담벼락 바깥이 그리웠고, 법무장교로 임관해 배치 받은 후에는, ‘바깥에 있는 연수원 동기들은 이 시간 동안 열심히 일해서 경력도 쌓고 돈도 벌텐데, 나는 3년 동안 여기 있다가 나가서 적응을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다. 나 또한 하루를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일과가 끝나면 공부나 운동을 해 보자고 마음도 많이 먹었는데, 의욕만 앞섰을 뿐 끝나고 보니 제대로 한 건 별로 없었다.

그게 십 년도 더 전의 일이라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시간은 빠르다. 제대 후 하루하루 버티기로 살았더니 벌써 사십 대가 돼 있다.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과 없이 살아남았고 가정도 꾸렸으니 다시 해보라고 해도 이것보다 더 잘할 자신은 없다.

성공의 기억도, 아픈 상처도 모두 물건으로 남는다. 그 안에는 과거의 추억과 사람들이 담겨있다. 과거의 시행착오를 거울삼아 나는 다시 앞으로 나간다. 그 시간과 물건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을 것이다.

내일의 나에게는 또 어떤 추리닝과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까? 오늘은 아내가 사준 잠옷 대신 파란색 추리닝을 입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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