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의 부음을 들은 건 방송 5일 전이었다. 20년 넘게 방송작가로 일하면서, 방송을 앞두고 출연했던 분의 비보를 접한 게 처음이었다. 황망함을 안고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투병 중이셨지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기꺼이 카메라 앞에 섰던 그분은 곧 강연하기로 했다며 의욕을 보이셨던 터였다. 나지막하지만, 한마디 한마디 힘이 실려 있던 그 목소리가 마지막이 될 줄 그땐 몰랐다.
그분과 처음 만난 건 지난 6월, 특집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서였다. 6·25 전쟁 70주년인 올해는 방송마다 다양한 특집이 기획됐고, 내가 맡은 프로그램도 그중 하나였다. 민간인 신분으로 전쟁의 포화 속을 누빈 숨은 영웅들을 찾아 나섰고, 어렵게 그분과 연락이 닿았다. 젊은 사람들에게 허투루 보이고 싶지 않다며 넥타이에 모자까지 챙겨 쓰고 나오신 노신사는 열일곱 나이에 군번도 없이 총을 들었던 학도의용군 손주형 선생이었다.
1950년 8월, 낙동강까지 밀린 국군에게 포항은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보루였다. 당시 포항여중에 모인 71명의 학도의용군 중에 손주형 선생이 있었다. 그리고 8월 11일 새벽, 북한군 정규부대와 11시간이 넘는 치열한 사투가 벌어졌다.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에 맨몸으로 맞선 젊은 목숨들 덕분에 포항시민 등 20만여 명이 탈출할 수 있었고, 낙동강 전선을 지켜낼 수 있었다. 2010년 개봉한 영화 ‘포화 속으로’의 실제 이야기다. 하지만, 전쟁은 2시간짜리 영화가 아니었다.
첫 방아쇠 당기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며 말을 시작한 그분은 그날의 전투가 얼마나 참혹했는지, 죽어가는 친구들을 지켜봐야 했던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도 얼마나 용감하게 맞섰는지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하고 싶었던 말을 이어갔다. “난 거울을 잘 보지 않아요. 그날 이후, 내 눈빛이 달라졌기 때문이죠. 사람을 죽인다는 게 뭔지 아시오? 아직도 꿈을 꾸면 그날 그곳에 있어요. 눈을 뜨면 며칠 끙끙 앓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전쟁의 비극은 우리로 끝나야 합니다.” 떨리는 목소리에 아픔과 노여움이 함께 묻어 있었다. “당신이라면, 열일곱 살에 죽음을 각오하고 그곳에 있을 수 있겠소? 그런데, 왜 기억하지 않습니까? 왜 6월이 되어야 우리를 찾는 건가요?” 70년이 지나도록 그를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한 건, 호국보훈을 앞세워 연례행사를 치르지만, 정작 평소엔 기억하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였다.
서울 국립현충원 무명용사탑 뒤 포항여중전투 전사자 유골함에는 뒤늦게 수습한 48구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그중 확인된 10분을 제외하고, 모두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다. 70년 전 그날에 시간이 멈춘 친구들에게 ‘곧 만나자’며 눈물을 흘리던 백발의 노신사는 그렇게 평생 잊지 못한 친구들 곁으로 떠났다. 그리고 8월 11일 오늘, 살아계셨다면 포항에 계셨을 그는 이제 그곳에 없다. 시간이 많지 않다. 어제의 당신이 있어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그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이 땅의 평화를 온전히 지켜 내는 것, 남아있는 우리의 몫이다.
다시 한 번, 삼가 고(故) 손주형 선생님과 70년 전 오늘 포항여중전투에서 희생된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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