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지진·전쟁·약탈… 역사 시련 이겨낸 ‘성스러운 지혜’

입력 2020. 08. 07   17:25
업데이트 2020. 08. 09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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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터키의 아야 소피아


비잔틴·이슬람건축 혼합 양식
360년 콘스탄티우스 2세가 건설
532년 대성당 형태 갖춰 

 
제4차 십자군 원정 약탈 겪고
1453년 ‘모스크’로 개조
근대 인류 공동유산 박물관 개관
지난달 다시 모스크로 행정 명령


아야 소피아 전경.  사진=heritagetribune.eu
아야 소피아 전경. 사진=heritagetribune.eu

터키의 이스탄불에 있는 아야 소피아(Aya Sofia·터키어) 또는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그리스어)는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으로 비잔틴 건축과 이슬람 건축이 혼합된 종교 건축물이다. 이곳은 3세기에 동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 대성당으로 처음 지어졌다. 대지진과 화재로 무너진 건물을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명령으로 537년 완공, 1204년까지 기독교 성당으로 사용됐다.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1204년부터 1261년 로마 가톨릭 성당이 됐다가 다시 약 200년 동안 기독교 성당이 됐다. 1453년 오스만제국이 이스탄불을 장악하면서 메흐메드 2세의 명에 따라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로 개조돼 450년 넘게 사용됐다. 1935년 박물관으로 지정됐다가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공약으로 내세운 모스크 변경이 올해 7월 터키 최고 행정법원에서 통과돼 모스크(이슬람교의 예배당)로 개장했다.

아야 소피아 내부 전경.  사진=medium.com
아야 소피아 내부 전경. 사진=medium.com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재건축

4세기경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로마가 위협에 처하자 330년 5월 11일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스탄불을 ‘제2의 수도’로 삼으며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명명했다. 360년 2월 15일 콘스탄티우스 2세(317~361)가 목재로 된 아야 소피아를 건설했지만 404년 일어난 폭동으로 모두 소실됐다. 두 번째 성당은 11년 뒤인 415년 10월 10일 테오도시우스 2세(401~450) 때 목조로 재건됐다. 하지만 532년 1월 유스티니아누스 1세(483~565)의 과도한 세금 정책에 ‘니카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도시 곳곳에 방화가 벌어지면서 아야 소피아는 잿더미가 됐다.

532년 2월 23일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성난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아야 소피아의 재건을 결정하면서 이전보다 더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을 건축가인 이시도로스와 수학자인 안시미오스에게 짓도록 했다. 1만 명 이상의 인력이 동원돼 532년부터 537년까지 당대 유례가 없는 대역사가 진행됐다. 마침내 537년 12월 27일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대성당의 완공을 선포했다.

로마 가톨릭 성당으로 활용

수차례의 자연재해가 발생하며 대성당에 손상이 갔다. 553년 8월과 557년 12월 두 차례에 걸쳐 지진으로 중앙 돔에 금이 갔고, 결국 558년 5월 발생한 지진으로 중앙 돔이 무너져 내렸다. 859년의 대화재, 869년과 989년의 대지진으로 또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더 큰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전쟁이었다.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베네치아 공화국에 설득당한 십자군 지휘부들은 이집트 원정 대신 1202년 기독교 도시인 달마티아의 자라(헝가리 보호령)를 약탈한 후에 1204년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했다. 2만여 명의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아야 소피아를 포함한 주요 건물들을 대대적으로 약탈했다. 아야 소피아를 장식하던 황금 모자이크, 보석, 성 유물들은 베네치아로 옮겨지면서 주로 산마르코 대성당을 장식하는 데 쓰였다. 플랑드르(벨기에 동플랑드르와 서플랑드르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 백작인 보드앵(1172~1205)이 황제로 추대되면서 동로마제국에서 일시적으로 라틴제국(1204~1261)이 성립됐는데, 아야 소피아에서 1204년 5월 16일 황제 대관식이 열렸다. 라틴제국 동안 아야 소피아는 로마 가톨릭의 성당으로 활용됐다.

1453년 이슬람교 예배당 ‘모스크’로 개조

비잔틴-오스만 전쟁(1265~1453)의 종지부를 찍은 1453년 5월 29일 오스만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1432~1481)의 군대가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뚫으며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했다. 술탄은 병사들에게 오스만제국의 관습에 따라 3일간의 약탈을 허용했다. 아야 소피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메흐메드 2세는 약탈이 끝난 날 오후에 도시로 입성하자마자 아야 소피아로 향했다. 이곳이 파괴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술탄은 대성당을 파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 아름답게 만들겠노라고 천명하고, 이슬람교의 예배당인 모스크로 사용할 것을 선언했다. 아야 소피아는 모스크로 변하며 성당의 인물 모자이크와 벽화는 석회로 덧칠됐는데, 이로 인해 오히려 석회 속에 모자이크와 벽화가 보존됐다.

오스만제국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권 편을 들었다가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면서 힘을 잃게 돼 케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민족주의 정권에 의해 멸망됐다. 터키 정부는 1935년 아야 소피아를 모스크에서 인류 모두의 공동유산인 박물관으로 개방했다. 이곳은 외부 복도와 내부 복도, 본당 1~2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대한 중앙 돔은 직경 31m, 높이 54m에 달한다. 외부에는 이슬람 사원의 첨탑인 미나레트가 4개 세워져 있다.

한편 지난달 10일 터키 최고 행정법원은 아야 소피아 박물관 지위를 박탈한다고 만장일치로 판결했고, 같은 날 에르도안 대통령이 터키 종교청이 관리하는 모스크로 바꾸는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아야 소피아는 다시 모스크가 됐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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