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5일 새벽 2시, 순찰을 위해 회담장 앞 도로를 걷는다. 북한이 개성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등 한반도의 긴장감이 고조돼서 그런지 판문점의 고요함은 안정감보다는 서늘한 느낌을 준다.
6·25전쟁 중 공산군과 유엔사 간 대화와 협력의 장소였던 판문점. 과거 판문점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피해 북쪽으로 피란가던 선조 일행이 다리가 없어 강을 건너지 못하자 마을 백성들이 집의 대문(널문)을 뜯어 임시로 다리를 놓았다고 해서 ‘널문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 후 6·25전쟁 때 정전회담 과정에서 중국 측이 회담 장소를 잘 찾을 수 있도록 이름 없는 주막에 널문리의 한자식 표기인 ‘판문점(板門店)’ 간판을 내걸었고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지난 4·27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판문점은 한반도 평화의 상징이 됐지만,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곳은 평화와 위기가 공존했던 한반도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울과도 같은 곳이다. 1968년 4월 14일 유엔사 경비병 트럭 피습 사건, 1978년 8월 18일 도끼 만행 사건, 1984년 11월 23일 소련인 기자 망명 사건 등 북한의 대남도발과 예상치 못한 귀순으로 무력충돌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많은 선배 전우가 안타깝게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올해는 6·25전쟁 발발 70주년이다. 우리 부대 또한 추모식을 통해 선배 전우들의 희생으로 이뤄낸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겠다고 다짐했다. 과거 역사를 돌이켜보면 국방이 약한 국가는 대내외적으로 위협을 받았고, 그에 따른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왔다.
지금도 예외는 아니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안일한 의식과 나태함에 빠지는 순간 국가는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다시는 6·25전쟁과 같은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가 선배 전우들의 뒤를 이어 확고한 군사대비태세를 확립하고 유비무환의 자세로 강인한 체력과 굳건한 안보의식을 갖춰야 할 것이다.
아직 운영되고 있지 않지만 공동경비구역 내에는 합동감시초소가 설치돼 있다. 합동감시초소 앞에서, 북한군이 끄지 않고 간 초소 전등을 보며 도끼 만행 사건 이전 공동경비구역의 모습을 잠시 상상해 봤다.
미래의 어느 날, 판문점에서 6·25전쟁이 끝났음을 세계에 알리는 날이 올 수 있을까? 북한과의 거리 단 1m.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철책 없이 대치하고 있는 이곳 판문점에서 선배님들의 숭고한 희생을 되새기며 책임 완수의 각오를 다시 한 번 다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