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병률 시론] ‘봉오동전투 100주년’을 맞아

입력 2020. 06. 04   16:41
업데이트 2020. 06. 05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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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홍범도 장군』 저자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홍범도 장군』 저자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20년은 우리 독립군이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한 해다. 1919년 11월 3일 국내외 동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출범한 통합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했다. 북간도 지역의 독립군들은 1920년 3월 이후 6월 초에 이르기까지 30여 회에 걸쳐 두만강을 건너 국경의 일본수비대를 공격했다. 6월 4일 독립군 1개 소대가 월강해 종성의 일본군 국경수비대를 공격하고 돌아가자, 일제는 독립군을 멸살하고자 추격대와 토벌대를 편성해 월강했다. 그러나 봉오동의 지리적 사정에 밝은 데다 노련미까지 갖춘 홍범도 등 독립군 지휘부의 매복전에 걸려든 일본군은 쓰라린 패배의 맛을 볼 수밖에 없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연합국으로서 제1차 세계대전과 시베리아 내전에 참전하며 불패의 전설을 쌓고 있던 아시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일본과 맞서 싸운 승리였다. 임시정부 군무부의 발표에 따르면, 일본군 측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의 피해를 보았고, 독립군 측은 전사 4명(장교 1명, 병사 3명), 중상 2명에 불과했다. 일본 측은 전사 1명이라고 패배의 의미를 축소하고 일본군이 학살한 농민 24명을 독립군 전사자로 둔갑시켜 발표하는 뻔뻔함을 드러냈다.
100년 전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 장군. 봉오동전투의 승리는 외부 지원 없이 우리 힘만으로 일궈낸 승리라는 점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100년 전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 장군. 봉오동전투의 승리는 외부 지원 없이 우리 힘만으로 일궈낸 승리라는 점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봉오동전투의 승리 소식을 접한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의 제1회전’이라고 환호하며 국내외에 승전보를 알렸다. 봉오동에서의 승리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의 군무도독부, 대한국민회 세 단체의 연합세력(북로독군부)과 신민단 군대 등 북간도 지역 항일 무장단체들이 합심해 일궈낸 승리였다. 이들 독립군 단체가 종교적 배경과 출신 지역의 차이를 뛰어넘는 연합의 정신으로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했던 것이다.

봉오동전투의 승리는 외부 지원 없이 우리 힘만으로 일궈낸 승리라는 점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또한, 봉오동전투의 승리는 조선 시대 내내 지역적 차별과 지배계급의 착취에 억눌려 살았던 민초(民草)들, 특히 고향을 떠나 남의 나라 영토에서 힘들게 정착해 사는 함경도 출신 이주 농민들의 성원과 희생으로 가능했다.

이 점을 간파한 일제는 식민지체제에 크나큰 위협을 주고 있는 독립군을 근절하고자 독립군 활동의 근거지인 서북간도의 한인사회에 대한 대대적인 파괴와 학살에 나섰다. 일제는 훈춘(琿春)사건(10월 2일)을 조작해 ‘출병’의 명분을 만든 후 2만5000명에 달하는 침략군을 편성해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포위하듯이 서북간도 각지를 점령했다. 10월 9일부터 11월 31일까지 2개월 동안 일본 침략군은 서북간도를 횡행하며 우리 동포 3500여 명을 학살했고, 민가·학교·교회를 불 지르고 파괴하고 재산을 강탈했다. 성인 남자들은 보이는 대로 잡아 죽이고, 심지어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잔인하게 학살했다. 무도 불법의 일본군은 무고한 농민들을 불에 태워 죽이고, 총을 쏘고, 도검으로 찔러 죽였다. 할아버지와 손자, 아버지와 아들, 형과 동생을 함께 죽이고, 아기를 잉태한 임부(妊婦)까지 거리낌 없이 학살하는 극악무도한 만행을 자행했다.

봉오동전투를 이끈 독립군 지도자들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인물은 홍범도 장군이었다. 봉오동전투가 임박했을 때 그는 봉오동 상촌의 어느 산 정상에 올라 멀리 고국을 바라보면서 “아, 내가 몇 년 만에 고국산천을 보게 되는가!”라며 장탄식을 하고 흐르는 눈물을 감추었다고 한다. 이 일화가 널리 알려지면서 동포들은 홍범도 장군의 애국심에 전폭적인 공감을 보였다고 한다.
봉오동·청산리대첩을 보도한 독립신문 기사(1920년 12월 25일 자).
봉오동·청산리대첩을 보도한 독립신문 기사(1920년 12월 25일 자).

홍범도 장군은 전형적인 평민 출신의 의병장이자 독립군 지도자로서 휘하의 부대원들과 노동을 함께하며 생사고락을 나누는 데 익숙해 부하들은 그를 ‘홍대장’이라 부르며 깊은 존경과 신뢰의 마음을 보여주었다. 홍범도 장군은 “고향 산천을 떠나 타국의 영토를 떠돌아다니며 비참한 생활을 꾸려가고 있는 동포들로부터 금전과 곡식의 의연(義捐)을 받고 있는 것이 심대한데, 만일 우리가 독립의 뜻을 버리거나 세계 각국의 비웃음을 사는 일이 있다면 우리 동포들에게 무슨 면목이 있겠는가”라고 말하여 농민들로부터 폭넓은 신뢰를 얻고 있었다. 독립군 병사들 역시 대장인 홍범도 장군의 애국심과 동포 사랑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봉오동전투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면 이념과 정파, 종교적 배경과 출신 지역, 계급적 차이를 뛰어넘는 단합의 정신, 외세의 개입 없이 우리의 힘만으로 우리의 운명을 개척한다는 자주독립의 정신 그리고 평범한 민초들의 희생과 신뢰를 배신하지 말아야 한다는 한없는 위민정신일 것이다.

우리가 비록 하나의 민족으로서 두 개의 분단된 국가에 나뉘어 살고 있지만, 100년 전 봉오동전투가 남겨준 역사적 교훈은 세월의 간극을 넘어 엄연한 불변의 생명력을 갖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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