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우승만 11회…임요환과 필생의 라이벌

입력 2020. 02. 27   15:51
업데이트 2020. 02. 27   15:56
0 댓글

<7> ‘폭풍 저그’ 홍진호 선수


스타크래프트 4대 천왕 중 한 명
e스포츠 초창기 팬덤 형성 한몫
적이 가장 약한 짧은 순간 노려
순식간에 몰아치는 플레이 자랑

 
2004년 희대의 라이벌전
3경기 모두 허무하게 패배

 
은퇴 후 예능서 천재적 직관력 과시
만년 2인자 아이콘…웃음 선사도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에서 희대의 사건이기도 했던 임요환과 홍진호의 이른바 ‘3연벙’ 순간. 세기의 매치를 기대했던 팬덤의 기대와 달리 총 경기 시간 22분에 머무르는 짧고 일방적인 경기가 나오면서 e스포츠 판이 들썩였고, 패자인 홍진호의 커리어는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필자 제공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에서 희대의 사건이기도 했던 임요환과 홍진호의 이른바 ‘3연벙’ 순간. 세기의 매치를 기대했던 팬덤의 기대와 달리 총 경기 시간 22분에 머무르는 짧고 일방적인 경기가 나오면서 e스포츠 판이 들썩였고, 패자인 홍진호의 커리어는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필자 제공

프로게이머 홍진호는 은퇴 후 예능 프로그램에서 게이머 특유의 천재적 직관력을 드러내며 사람들에게 게이머라는 존재를 다시 보게 만들기도 했다. 사진은 tvN 예능 ‘더 지니어스’에서 압도적 실력으로 승리를 따내는 장면.  tvN 제공
프로게이머 홍진호는 은퇴 후 예능 프로그램에서 게이머 특유의 천재적 직관력을 드러내며 사람들에게 게이머라는 존재를 다시 보게 만들기도 했다. 사진은 tvN 예능 ‘더 지니어스’에서 압도적 실력으로 승리를 따내는 장면. tvN 제공


매년 12월에 가수 머라이어 캐리는 캐럴송으로 특수를 맞는다. 한국에선 10월의 마지막 날에 가수 이용이 자신의 노래 ‘잊혀진 계절’로 연금을 탄다는 농담이 있다. e스포츠계에도 의외로 그런 달을 가진 사람이 있다. 2월 하면 떠오르는 대표 게이머, 홍진호다.


e스포츠 초기, 최초의 라이벌 만들어내다

지난 회차에서 임요환이 ‘e스포츠’라는 개념이 성립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임을 이야기한 바 있지만, 사실 그 임요환에게 결코 밀리지 않는 라이벌로 서 있었던 게이머가 바로 홍진호다. 테란의 황제 임요환에 맞서 양대 리그 공식 전적에서 거의 비등한 교환비를 이끌어낸 저그 게이머 홍진호는 초창기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 리그에서 본격적으로 팬덤을 형성하며 붐을 일으킨 인물 중 하나로 기억된다.

2000년대 초반을 지배한 이른바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의 4대 천왕이 있었다. 임요환(테란), 홍진호(저그), 박정석(프로토스), 이윤열(테란)이다. 이들 네 사람은 뛰어난 성적으로 리그를 호령했을 뿐만 아니라 매력적인 플레이를 펼치며 팬들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이끌어 낸 인물들이기도 하다. 그중 특히 압도적인 주목을 끌었던 임요환과 그와 필생의 라이벌 홍진호의 이야기는 e스포츠가 단순한 게임관전에서 벗어나 선수와 선수 사이에 벌어지는 온갖 갈등과 대결의 이야기로 확장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준우승에 가려진 폭풍 같은 플레이의 상징

홍진호의 플레이를 상징하는 단어는 ‘폭풍’이었다. 폭풍저그 홍진호라는 닉네임은 그가 게임에 나설 때 시청자들이 무엇을 기대하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기도 했다.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 초창기에 저그 종족은 주로 강력한 생산력으로 후반 물량을 통해 승기를 잡는 전략에 기대고 있었고, 황제 임요환은 저그가 생산을 위해 일꾼과 건물에 투자하며 약해지는 그 중반을 노려 한 발짝 빠른 진출로 저그를 압살하는 플레이를 능수능란하게 펼치며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는 중이었다.

그러나 홍진호의 저그는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그는 후반을 대놓고 노리는 대신, 저그의 약점인 중반을 노리는 테란의 진출 시점에 맞춰 최적의 병력을 뽑아내며 오히려 먼저 테란의 본진을 흔드는 플레이를 선보였다. 일꾼을 모으며 넉넉한 자원으로 풍부한 물량을 선보이는 대신, 쥐어짜는 듯한 느낌으로 자신이 가장 강하고 적이 가장 약한 그 짧은 시점을 노려 순식간에 몰아치는 홍진호의 플레이는 정말 폭풍이라는 단어가 아깝지 않을 만큼의 압도감을 자랑했다.

홍진호라는 번뜩이는 저그 플레이어의 등장으로 이후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에서의 저그 플레이는 과거와 달리 후반 일변도의 전략이 아니라 초·중·후반을 모두 능수능란하게 활용하며 상대와 적극적인 교전을 피하지 않는 더욱 공격적인 플레이로 변화했다.

테란과 저그를 각각 대표하는 두 사람, 임요환과 홍진호의 라이벌 관계는 이른바 ‘임진록’이라는 이름으로 브랜드가 되기도 했다. e스포츠 최강의 흥행카드는 이 두 사람이 리그에서 맞붙는 순간이었다. 그런 라이벌 관계가 결정적으로 흔들려버린 순간이 2004년 온게임넷 EVER 스타리그 4강전이었다.

두 선수 모두 이제 노쇠화의 단계에 접어들어 더 이상 다음 결승을 기약할 수 없는 2004년 4강전의 ‘임진록’은 선수와 방송 관계자, 시청자 모두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다시 맞붙은 두 사람이 어떤 플레이를 펼칠지 기대하며 TV 앞에 모였던 시청자들은 허무한 결과를 받아 들어야 했다. 임요환이 세 경기 모두 초반 5분 만에 벙커링(테란이 초반 소수 병력을 이용해 적 기지 안에 방어시설인 벙커를 지어 경기를 빠르게 끝내는 플레이)을 성공시키며 3대0의 싱거운 승리를 거뒀기 때문이다.

희대의 라이벌전이 ‘시킨 치킨이 오기도 전에 끝나는’ 충격적 결과로 끝나면서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 팬덤은 크게 들썩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은 것은 패자 홍진호였다. 홍진호는 이후 게임에 대한 자신감을 크게 상실하며 다시는 리그에서 메인 위치에 오르지 못했고, 두 사람 모두 하락하는 기량과 함께 스타판의 중심에서 벗어나게 됐다. 이른바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의 낭만 시대가 종언을 고한 것이다.

사태 이후 홍진호의 팬덤과 안티는 홍진호의 그동안 전적들을 모으며 그에게 2라는 아이콘을 선사했다. 홍진호는 양대 리그 커리어를 통틀어 우승 경력 없이 준우승만 11회 달성하는, 성적에 비해 다소 기이한 결과를 들고 있었고, 만년 2인자라는 콘셉트는 이후 홍진호를 끝없이 따라다니며 그를 ‘2’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e스포츠 최대 스토리텔러, 예능까지 넘보다

프로게이머 은퇴 후 방송인 겸 프로 포커 플레이어로 전업한 홍진호는 이제는 패배와 준우승의 아픔을 딛고 2를 자신의 아이콘으로 삼아 활동 중이다. 케이블TV 예능 프로그램 ‘더 지니어스’에서는 게임 중 이마에 트럼프 카드 2를 붙이고 승리하며 게이머 시절의 한을 풀기도 했고, 이후에도 스스럼없이 2라는 숫자를 받아들여 대인배로 칭송받기도 했다.

비록 ‘영원한 준우승자’라는 오명 속에 그의 플레이가 폄하되는 경우도 있지만, 홍진호의 전성기 시절 활약은 결코 1인자 임요환에게 뒤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2020년까지 이어지는 e스포츠의 성립 초기 한 축을 담당한, 명예의 전당 헌액자라는 사실 역시 변하지 않는다. <이경혁 게임 칼럼니스트>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0 댓글

오늘의 뉴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