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열 아카데미 재학생들, 영국 미술사 첫 장을 열다

입력 2019. 06. 19   17:16
업데이트 2019. 06. 19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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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라파엘 전파- yBA, 미술공예운동, 아르누보, 그랜드 매너


영국에만 국한…장식미술 선도
“르네상스 이전으로 돌아가자” 주창
자연 관찰·세부묘사 중시
훗날 아르누보 양식 전형돼 

 
밀레이 ‘부모 집에 있는 그리스도’
사실주의로 논란 일며 유명세 얻어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의 ‘라 기를란다타’.  필자 제공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의 ‘라 기를란다타’. 필자 제공
밀레이의 ‘부모 집에 있는 그리스도’.
밀레이의 ‘부모 집에 있는 그리스도’.

서양 미술사를 살펴보면 오늘날 ‘yBA(Young British Artists)’의 명성에 비해 영국 미술의 비중이 미미하다는 것을 알고 조금 놀라게 된다. 사실 미술사에서 영국 화가들의 활약상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미술에 있어서 영국은 수입국 입장이었다. 거의 처음으로 미술사에 언급된 영국 중심의 미술이 18세기 ‘라파엘 전파(前派)(Pre-Raphaelite Brotherhood)’임은 이런 현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라파엘 전파는 영국에 국한된 미술 운동이었다. 하지만 이런 미학에 바탕을 둔 윌리엄 모리스(1834~1896)가 주축이 된 미술공예운동(Arts & Crafts Movement)이 프랑스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라파엘 전파는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의 전형이 됐다. 이후 1910년경까지 유럽 전역의 장식미술을 선도한 것이 영국 미술의 미술사에서의 위치다.

이전까지 영국에서의 그림 수요는 주로 플랑드르 지방의 화가들이 맡았다. 특히 찰스 1세(1600 ~1649)의 부름으로 영국으로 와 8년 동안 궁중화가로 활동한 반 다이크(1599 ~1641)와 현실 비판적인 풍자화가 호가스(1697~1764)의 영향으로 영국 미술도 변화의 계기를 맞았다.

이후 르네상스 거장의 양식, 즉 그랜드매너(Grand manner)를 이상으로 활달한 양식을 추구하면서 성격 묘사를 강조한 반 다이크 풍의 우아한 초상화를 그린 조슈아 레이놀즈(1723∼1792)와 자연을 관조하며 이를 바탕으로 주관적 풍경화로 영국 풍경화의 기초를 세운 토머스 게인즈버러(1727∼1788)가 영국 미술의 기초를 마련했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1768년 보수적이며 엘리트적인 미술문화를 지향하는 독립기관인 로열 아카데미가 세워졌다. 또 여름전시를 통해 새로운 화가들을 발굴, 회원으로 영입하고 전원 장학금을 지급하는 미술학교가 운영되면서 영국 미술문화는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이 학교에 재학 중이던 한 무리의 젊은 재학생들은 1848년 라파엘 전파를 구성했다. 이들은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인위적이며 상상을 초월한 새로운 도덕적 심각성과 진실성을 표방하는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라파엘 전파는 14세기와 15세기 이탈리아 미술에서 영감을 얻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이상화된 그림 이전으로 돌아가 자연의 관찰과 세부묘사를 중시하는 그림을 목표로 했다. 과거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혁신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펼쳐진 라파엘 전파의 활동은 5년여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들은 영국 미술과 장식미술, 실내 디자인 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라파엘 전파는 시인이기도 했던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1828~1882)와 윌리엄 홀먼 헌트(1827 ~1910), 존 에버렛 밀레이(1829~1896) 등 3명으로 시작됐다. 로세티는 낭만주의 시와 미술을 결합, 발전시키는 데 관심을 가졌다. 이들이 첫 모임을 갖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각가 토머스 울너(1825~1892)와 화가 제임스 콜린슨(1825~1881), 화가이자 비평가인 프레더릭 조지 스티븐슨(1828~1907), 단테 가브리엘의 동생 윌리엄 마이클 로세티(1829~1919)가 합세했다. 회원은 아니었지만 이들의 멘토 역할을 한 화가 윌리엄 다이스(1806~1864)와 포드 브라운(1821~1893), 토머스 콜린스(1828~1873), 조각가 알렉산더 먼로(1825~1871) 등도 함께했다.

이들은 조슈아 레이놀즈 풍의 영국 아카데미즘을 부정하며 의도적으로 중세와 초기 르네상스의 프레스코를 연상시키는 회색조의 색채와 어색한 구성, 전통적이며 치밀한 사실주의를 통해 복고풍의 그림을 그렸다. 특히 성경과 중세 문학적 주제에 사적인 시적 상징주의를 결합시켰다. 하지만 이런 그들의 태도는 1850년 밀레이가 ‘부모 집에 있는 그리스도’를 발표하면서 논란에 휩싸였다. 소설가 찰스 디킨스(1812~1870)는 “학문적 이상으로서의 아름다움을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타협하지 않는 사실주의로 종교적 주제를 다뤘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이런 비판은 오히려 라파엘 전파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권위 있는 미술평론가 존 러스킨(1819~1900)이 언론과 강연, 라파엘 전파에 보낸 편지를 통해 밀레이를 지지하고 후원하면서 유명세는 더 커졌다. 하지만 이들은 1854년경 흩어졌다. 원인은 로세티와 번 존스, 윌리엄 모리스는 감각적이며 신비로운 낭만적 복고주의와 중세주의를 추구했고 밀레이와 헌트는 사실주의를 고수했기 때문이다. 라파엘 전파는 1850~1860년대 무어(1841 ~1893)나 미국에서 온 휘슬러(1834~1903) 그리고 후에 영국과 미국의 인상주의의 완성에 크게 기여한 사전트(1856~1925)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802년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의 아미앵 조약이 체결된 뒤 유럽으로 건너가 다른 문화와 자연을 체험한 윌리엄 터너(1775~1851)의 등장으로 영국 미술은 급격히 변화했다. 영국문화가 결정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빅토리아 여왕(1819~1901) 시절부터다. 빅토리아 여왕은 64년 동안 영국을 통치하면서 소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실현했다. 특히 빅토리아 여왕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심과 취미는 영국 미술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다. 공예미술의 보고라 일컫는 빅토리아 앨버트미술관도 ‘여왕의 선물’이다.

정준모 큐레이터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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