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역사에서 만나는 전쟁 이야기 - 전쟁과 표준
남북전쟁 등 군수품 납품 셀러스
해군 규격 표준 승인 실적 내세워
기계산업 발달 필라델피아에 나사 공급
철도회사·강철회사까지 납품 성공
1904년 볼티모어시 화재사건 때
소방차 호스 입구 규격 달라 혼선
미 국민 ‘표준의 중요성’ 일깨워
2차 대전 직후 마침내 ‘ISO’ 탄생
부품 단순화 호환 조면기 등장 ‘기폭제’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더욱 가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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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현대 자본주의의 핵심 요소인 공장식 대량생산과 대중의 대량소비 체제가 어떻게 포드의 자동차 왕국에서 완성됐는지를 살펴봤다. 그런데 미국에서 이와 같은 혁명적인 방식의 대량생산이 가능했던 배경 중 하나는 미국이 생산 기준이 되는 산업과 공업의 ‘표준화’에 상당히 앞섰기 때문으로 해석되고 있다.
생산의 표준화에는 크게 3가지 의미가 중첩돼 있다. 먼저 생산 공정의 표준화다. 포드 공장의 컨베이어벨트 작업 라인 시스템은 테일러의 노동작업의 과학적 기법을 기반으로 분업의 효율성을 극대화한 생산공정의 표준화였다.
그런데 생산공정의 표준화는 조립되는 각 부품이 표준화돼 있지 않으면 효과를 볼 수 없다. 또한 동일 기준으로 표준부품이 정해지려면 먼저 각 지역에서 공급돼 모이게 되는 부품의 길이나 무게와 같은 단위, 즉 도량형 기준이 같아야만 최종 제품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진다. 즉 오늘날의 현대적 대량생산체제는 도량형과 부품, 그리고 생산공정의 삼박자의 표준화가 함께 이뤄져 가능한 것이다.
20세기 초 미국은 이미 대부분의 부품 공급을 자국 내에서 해결하고 있었다. 만성적인 노동력 부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호환되는 부품을 쓸 수 있도록 만든 조면기와 소화기로 성공을 거둔 휘트니와 개틀링, 맥심으로 이어지는 미국의 사회적 여건과 환경에 대해 이미 설명했다.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부품을 단순화해 호환 가능하도록 만든 조면기 덕에 미국이 세계 최상의 면직 공업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또 동일한 원리를 소화기에 적용하면서 개틀링과 맥심 기관총의 혁신이 가능해졌다.
바로 이 과정은 미국에서 표준 나사 규격이 제정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산업표준의 본격적 출발은 모든 부품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기본 단위 ‘나사’의 규격화였다.
당시 미국의 작업장에서는 대부분 1841년 영국에서 규격화된 ‘휘트워스(J. Whitworth, 1803~1887)식’ 나사 규격을 채택하고 있었다. 휘트워스는 저격총의 원조로서 미국에 수입돼 남북전쟁의 인기품이던 휘트워스 소총과 강선포 발명가다. 영국 대표 방산기업인 휘트워스사(社)를 설립한 기업자이자 엔지니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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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 중 나사를 비롯해 급증하는 기계류와 군수품을 미군에 납품하고 있던 윌리엄 셀러스(William Sellers, 1824~1905)와 동료 일가들은 휘트워스 나사산(나사의 솟아 나온 부분)을 개량해 동일한 나사산 형상을 한 자신들의 ‘셀러스식’ 규격 나사를 미국 표준으로 만들어 필라델피아 지역에 대량으로 판매하고 싶어 했다.
셀러스는 자신의 근거지이자 미국 기계산업의 중심지였던 필라델피아에 산재한 기계공장들이 영국식보다 성능이 좋은 미국식 나사 규격을 정하면, 노동력을 줄인 상태에서도 상호 호환되는 나사를 쉽게 생산·공급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영국식 나사 없이도 군수품 생산과 보급이 더욱 쉬워질 것이라고 애국심을 강조하며 해군을 설득했고, 그러한 설득은 마침내 받아들여졌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셀러스는 해군의 규격 표준 승인과 납품 실적을 내세워서 당시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가 셀러스식 표준 나사를 채택하도록 만들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군대에 납품한 실적이 민간 기업이나 상업 시장에서 새로운 납품처를 개척하는 데 상당한 보증수표가 됐던 것 같다. 셀러스는 그 규격 승인에 힘입어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에 납품하던 볼드윈 증기기관차회사에 나사를 납품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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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만 아니라 철도회사에 레일을 납품하던 미드베일 강철회사에도 진입할 수 있었는데, 그 회사는 이미 셀러스사가 대량 지분을 가진 합작회사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결국 미 군부가 처음 승인했던 나사 표준규격이 미국의 국가 산업표준으로 자리 잡아갔다.
2차 산업혁명이 무르익어갈수록 나사와 같은 기계 부품뿐만 아니라 부품소재 영역에서도 산업표준 영역이 본격적으로 넓어지기 시작했다. 철도회사에 납품되는 강철소재인 강재 성분이 일정하지 않아 레일 파손 사고와 탈선 사고가 빈발했다. 이에 따라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납품되는 강재와 윤활유·페인트까지 국가가 고지하는 산업제품의 규격화 목록이 늘어갔다.
1904년 발생한 볼티모어시 화재 사건은 국민에게 표준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당시 주로 목재로 된 건물을 덮친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번져갔다. 그 와중에 볼티모어시의 길거리 수전 입구 크기와 볼티모어시 외부에서 파견된 다른 지역 소방차 호스 입구 규격이 맞지 않아 화재 진압에 큰 장애가 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공업제품뿐만 아니라 모든 장치와 시설에 대한 국가 표준규격의 통일도 국가적 이슈가 됐다.
이러한 국가 산업표준의 확대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더욱 가속화됐다. 대대적인 군수품 보급이 필요해지면서 기업들이 군수기업으로 전환됐다. 전쟁물자 생산과 공급을 원활히 하고, 야전 군수정비에 용이하도록 산업부품과 제품들의 표준화를 촉진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군수품 보급이 시급해지면서 1918년 미국 재료검사협회와 엔지니어협회가 전쟁부·해군부·상무부와 함께 미국 공학 표준위원회를 결성해 민간과 정부 간 협의 방식으로 군부와 민간 규격 간의 표준화를 진행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한 나라의 산업 표준화에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더 나아가 국제표준의 중요성을 더욱 키우는 계기가 됐다. 국가별 산업표준의 차이가 문제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동맹국과 참전국들이 상호 무기와 군수품을 주고받으면서 전장에서 정비·수리 등의 호환 문제가 빈발했다.
이러한 국제표준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46년 국제 산업과 공업표준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해지면서 현재의 국제표준기구(ISO·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Standards)가 설립됐고, 비로소 현대적인 국제표준화가 틀을 갖추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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