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Ⅱ - 90. 일본①
가고시마 남쪽 지란특공평화회관
매년 일본인 100만 명 이상 다녀가
1941년 육군비행학교 분교 개설
1945년 전세 악화되자 특공기지로
전투기 자살공격 전사자 439명 달해
희생자 중 한국인 11명 친일 논란
일본열도는 4개의 큰 섬(혼슈·규슈·시코쿠·홋카이도)과 6800여 개의 작은 섬으로 이뤄져 있다. 인구 1억2600만 명, 국토 면적은 37.8만㎢로 한반도의 1.7배다.
1인당 국민소득은 4만3000달러 수준이며, 재일 한인 동포는 약 82만5000명(재외동포 45만, 귀화자 37만5000명)이다. 일본 자위대는 24만7150명(육상 15만700명, 해상 4만5350명, 항공 4만6900명, 방위성 4200명)의 병력과 준군사부대 1만4350명, 예비군 5만6000명을 보유하고 있다. 자위대는 75%가 부사관·장교로 구성돼 유사시 신속한 병력 확장이 가능하다. 또한 5만5300명의 미군(육군 2500명, 해군 2만100명, 공군 1만2700명, 해병대 2만 명)이 일본에 주둔하고 있다. 이번 연재에서는 규슈의 최남단 가고시마에서 홋카이도의 최북단 와카나이에 걸쳐 있는 일본의 군사유적을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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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속열차 최남단 종착점 가고시마
신칸센(新幹線)은 일본의 중요한 상징물이다. 1964년 도쿄 하계올림픽을 계기로 세계 최초로 만든 고속열차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불과 20년 만에 시속 200~300㎞를 주파하는 철도체계를 완성해 일본 기술력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2014년 개통 50주년이 될 때까지 단 한 건의 사고도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160만 인구의 가고시마 신칸센 역은 복합상가건물에 있다. 여행안내소에서 역사유적지를 확인하고 터미널을 찾아 나섰다. 역사 입구에 혼자 안내판을 들고 있는 일본 고교생이 있었다. 체험학습을 떠나는 동료들에게 집결장소를 알려 주고 있단다. 필자가 한국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오우!”라는 탄성과 함께 까무러친다.
소년들이 흔히 가지는 이웃 나라에 대한 호기심이다.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라는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소년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바로 촬영 자세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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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의 선구자 ‘19인의 유학생 동상’
가고시마는 옛날부터 오키나와제도를 통해 대만, 필리핀, 베트남 등과 해상교류가 활발했다. 터미널 바로 옆에는 멀리 바다를 쳐다보고 있는 ‘19인의 유학생 동상’이 있다. 1865년 19명의 학생이 미지의 세계인 영국으로 가고자 가고시마항을 떠났다. 일본 최초의 해외유학생이다. 싱가포르를 거쳐 66일 만에 런던에 도착했다.
산업혁명 이후 천지개벽을 이룬 유럽 도시를 보면서 유학생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높은 빌딩, 거리의 전차, 남녀가 대낮에 거리낌 없이 입 맞추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일본의 개혁·개방에 대한 열정이 불타올랐던 이들은 미국·중남미를 거쳐 3년 후 귀국했다. 1868년 메이지유신이 시작되면서 유학생 대부분은 정부 요직에 발탁됐다. 1871년 일본 정부는 100여 명의 사절단을 미국과 유럽 12개국에 보내 2년 동안 순회시키면서 선진 과학기술을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하지만 대원군이 집권했던 당시의 조선은 거꾸로 강력한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펼쳤다.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서양의 침범에 대항하지 않는 것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라는 의지를 새긴 척화비를 전국 곳곳에 세웠다. 세계 변화의 도도한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위정자들의 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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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 기념관과 무사도 정신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이 된 ‘메이지유신 기념관’도 시내 중심부에 있다. 1868년 일본열도는 봉건체제가 막을 내리고, 삼권분립을 기초로 한 천황체제가 출범했다. 세제 개편을 통한 국가재정 확보, 의무교육과 학제 변경, 징병제 시행으로 국가 면모를 일신했다. 구미 열강을 모델로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력 강화에 국력을 쏟아부었다.
기념관 옆에는 여성과 청소년 교육을 중시한 사쓰마번(藩)의 ‘시마즈 다다요시’ 유적도 있다. 그는 사람의 도리, 삶의 태도, 지도자의 마음가짐을 노래 형태로 알기 쉽게 만들어 보급했다. 청소년 상무정신 함양을 위한 무술훈련 구호도 인상적이다. “첫 번째 칼을 의심하지 말라. 두 번째 칼은 패배다”라고 이야기했다. 즉 선제공격을 중시한 일격필살의 무사도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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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부각되는 지란특공평화회관
가고시마에서 시외버스로 한 시간 반 정도 남쪽으로 달리면 시골 마을 지란에 ‘특공평화회관’이 있다. 매년 100만 명 이상의 일본인이 몰려드는 전쟁기념관이다. 1941년 12월, 일본군은 육군비행학교 지란분교를 세웠다. 전세가 악화되자 1945년 3월, 오키나와와 가까운 이 분교는 특공기지로 바뀌었다. 전투기 자살공격으로 1036명이 전사했는데, 지란기지 출격자가 439명이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3800명의 일본군이 전투기·잠수정·보트로 미 군함에 돌진했다. 특공전투기에 귀환 연료 대신 폭탄을 가득 채웠다.
적함을 찾지 못한 상당수의 조종사는 연료 부족으로 망망대해에 추락했다. 1980년 6월, 심해에서 건져 올린 해군 항공기가 전시실에서 처참한 몰골로 당시의 비극을 증언하고 있다. 단체견학 학생들이 수백 명의 영정사진 앞에서 인솔교사의 설명을 숙연하게 듣고 있다. 교사의 역사인식이 어떤지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지만 이해할 수 없다.
단지 출격을 앞둔 앳된 조종사들이 주먹을 휘두르며 비장한 군가를 부르는 귀퉁이 영상물이 학생들의 감성을 울리고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호타루’ 개인전시관의 아리랑
지란특공대원 희생자 중 한국인은 11명으로 추정된다. 비행기지 근처의 도미야식당은 당시 조종사들의 단골집이었다. 여주인 도메 씨는 아무도 면회 오지 않는 한국인 탁경현 소위를 아들처럼 여겼다. 그의 고향은 경남 사천이다. 교토 약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엘리트 청년은 1943년 강제 징집됐다. 조종사관훈련을 마치자마자 그는 특공대원으로 차출됐다.
1945년 5월 10일 저녁, 출격을 앞두고 탁 소위는 작별인사 겸 식당을 찾았다. 그는 저녁을 먹으면서 “오늘이 마지막이니 고향 노래를 부르겠다”고 했다. 비통한 목소리로 아리랑을 부르자 여주인과 두 딸은 통곡했다. 그것이 탁 소위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여주인의 손자 메이큐 씨는 과거 식당을 개조해 ‘호타루(반딧불이)’라는 태평양전쟁 개인전시관을 열었다. 그는 주로 어린 시절 할머니한테서 직접 들은 특공대원들의 사연을 극적으로 재연했다. 전시실에는 전사한 조종사들이 남긴 유품·유서·편지·사진들이 가득하다. 특히 탁 소위의 추모곡 아리랑이 건물에서 수시로 울려 퍼진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한국인 특공대원들의 친일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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