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전쟁과 인간

그들이 주고 간 박격포, 봉오동·청산리서 불을 뿜다

입력 2021. 12. 01   15:50
업데이트 2021. 12. 01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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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 ‘설국열차’에 오른 체코의 청년들- 체코군단의 투쟁과 역경
 
1차 대전 터지자 제국군 합류 강요 받아
러시아 힘 빌려 독립하고자 연합군 가담
 
혁명·내전 상황 급변…유럽 귀환 결정
시베리아 횡단 열차로 블라디보스토크행
 
조선인 조우 ‘동병상련’ 독립운동 지지
떠날 때 무기 인도…항일전쟁 승리 기여

 
중부 유럽의 체코는 슬로바키아와 함께 합스부르크 왕가가 다스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식민지였다. 19세기 말 오스만튀르크와의 오랜 대립, 영국·프랑스의 팽창으로 약해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독일과 손을 잡았다. 보불전쟁(1870~1871)에서 프랑스를 꺾고 유럽의 새 강자로 떠오른 독일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영국·프랑스를 견제하고자 했다. 이렇게 형성된 유럽의 균형은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가 실각한 이후 흔들리기 시작했다. 독일의 젊은 황제 빌헬름 2세는 프랑스 식민지인 모로코에 세 차례(1905년, 1906년, 1911년) 해군을 파견해 무력시위를 벌였다. 독일의 해군력 증강에 위협을 느낀 영국과 프랑스는 군사 동맹을 맺고, 여기에 러시아가 가세해 3국 협상이 이뤄졌다. 이 협상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중부 유럽에서 고립됐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독일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총동원령을 내렸다. 서부전선에서 신속하게 승리한 뒤 러시아를 치려는 독일의 계획은 틀어졌다. 독일군 주력이 서부전선에 몰린 탓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러시아와 대치하는 동부전선에 많은 군대를 보내야 했다. 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여러 민족도 모두 동원돼 오스트리아 군복을 입고 러시아군과 싸웠다. 이때 슬라브 민족인 체코인들로 구성된 ‘체코군단’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 편입됐으나 곧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독립을 염원하던 체코인들은 러시아가 주장한 ‘범슬라브주의’에 감화됐다. 러시아의 힘을 빌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했던 체코군단은 같은 슬라브족인 러시아를 향해 총부리를 겨눠야 했다. 10만에 이르는 체코 병사들은 탈영해 러시아에 투항했다. 러시아는 체코군단의 투항을 크게 반겼다. 체코군단은 자국의 독립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면서 큰 전공을 세웠다. 1916년 브루실로프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군이 공세를 펼칠 때도 체코군단은 선봉에 섰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의해 강제로 동원된 국가 병사들은 크게 동요했다. 체코군단의 활약으로 타격을 입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체코인들을 탄압했다. 그러자 수많은 체코 청년들이 조국을 탈출해 연합군에 가담했다.

독립투쟁을 지속하기 위해 시베리아 횡단에 나선 체코군단 병사들 모습.  필자 제공
독립투쟁을 지속하기 위해 시베리아 횡단에 나선 체코군단 병사들 모습. 필자 제공

그러나 1917년에 접어들자 상황이 돌변했다. 1917년 11월 7일 볼셰비키가 적위대를 동원해 임시정부 청사인 겨울궁전을 점령하는 10월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자 이에 반발하는 반혁명군이 백군을 조직해 저항에 나섰다. 이렇게 시작된 ‘적백 내전’은 수백만 명의 희생자를 내며 1922년까지 이어졌다. 1917년 가을 독일군이 총공세에 돌입하자 혁명과 내전으로 분열된 러시아군은 패배를 거듭했다. 이때 체코군단도 많은 희생자를 냈다. 내부의 혼란으로 더는 전쟁을 지속할 수 없었던 러시아는 결국 1918년 3월 3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전쟁에서 이탈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폴란드, 우크라이나, 핀란드, 카프카스,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지역을 포기하고 독일에 60억 마르크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러시아가 사실상 항복하자 체코군단은 설 곳을 잃고 말았다. 독일군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항복하면 모두 처형당할 운명이었고, 러시아에 남게 되면 적위대와 백군 중 어느 한쪽에 가담하기를 강요당할 것이 뻔했다.

체코군단의 무장 열차.  필자 제공
체코군단의 무장 열차. 필자 제공

미국에 망명한 체코의 독립지도자 토마시 마사리크(1850~1937)는 체코군단에 가급적 적백 내전에 휩쓸리지 말고 전력을 보존해 서방 연합군에 합류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그러나 체코군단 단독으로 독일군이 점령한 지역을 돌파해 연합군에 합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영국·프랑스군이 북부 러시아 항구 무르만스크로 수송선을 보내겠다고 제안했으나 적백 내전이 한창인 지역을 통과해야 하는 위험한 루트였다. 체코군단은 광활한 시베리아를 횡단해 러시아 영토 동쪽 끝 항구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한 다음 거기서 배를 타고 유럽으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그것은 지구를 한 바퀴 가까이 돌아가는 엄청난 거리였다. 그러나 체코군단은 지체하지 않고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올랐다. 그들은 전쟁이 끝나기 전에 서방 연합군에 합류해 싸우는 것만이 조국의 독립을 앞당기는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부족한 공간 탓에 체코 병사들은 열차 지붕에도 빼곡히 올라탔다. 적군이나 백군과 충돌할 상황을 대비해 그들은 열차 곳곳에 기관총과 화포까지 설치했다. 체코군단은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킨 볼셰비키에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볼셰비키가 점령한 지역을 통과할 때는 금괴를 넘겨주고 무사 통과하기도 했다. 그들은 사기를 유지하려고 소리 높여 군가를 부르며 이동했고, 열차 안에서 병원, 우체국, 신문사까지 운영했다.

2011년 야로슬라프 올샤 체코 대사가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한 체코군단의 신문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 3·1 운동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려 있다.
  필자 제공
2011년 야로슬라프 올샤 체코 대사가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한 체코군단의 신문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 3·1 운동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려 있다. 필자 제공

1918년 7월 6일 시베리아를 횡단한 체코군단은 격전 끝에 볼셰비키 적군을 몰아내고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점령했다. 체코군단은 항구를 개방하고 연합군 수송선을 기다렸으나 유럽에서 전쟁은 이미 막바지에 이르렀다. 모든 여력을 모아 마지막 공세를 준비하던 연합군은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대규모 수송선을 보낼 형편이 아니었다. 체코군단은 1920년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다. 1919년 일본에 병합된 조선에서 3·1 운동이 벌어졌다. 3·1 운동 이후 조선의 애국청년들은 만주와 연해주로 이동해 독립 항쟁 거점을 만들었다. 이때 조선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무는 체코인들과 조우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체코군단이 만든 신문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Czechoslovak Dennik)’는 조선에서 일어난 3·1 운동을 여러 차례 보도했다. 체코군단 병사들은 자신들과 같은 처지에 놓인 조선인들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다. 1920년 2월 체코군단은 볼셰비키 정부와 정전협정을 맺고,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귀국하게 됐다. 정전협정으로 무장 열차를 운영할 수 없게 된 체코군단은 많은 무기를 조선인들에게 넘겼다. 체코군단이 독립군에게 인도한 무기는 박격포 2문, 기관총 6정, 소총 1200정에 탄약 80만 발이었다. 이 무기들은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독립군 승리의 원동력이 됐다. 훗날 체코의 골동품 시장에 조선에서 만든 금비녀, 금반지, 놋쇠 요강, 비단옷 등이 흘러나왔는데 그것들은 당시 조선인들이 체코군단의 무기를 사들이기 위해 지급한 현물이었다. 독립의 열망을 품은 채 ‘설국열차’를 오른 체코군단 병사들은 멀고 먼 극동에서 독립항쟁을 하던 조선인들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 2015년 7월 보후슬라프 소보트카 총리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체코는 아시아 국가 중 최초로 한국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었다.


필자 이정현은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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