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명탄

[곽재식 조명탄] 스파이더맨과 배트맨의 저력은 시원한 바람

입력 2021. 08. 05   16:18
업데이트 2021. 08. 05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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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 배트맨, 원더우먼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여기에 트랜스포머, 나아가 다이하드 시리즈의 존 매클레인 형사를 포함시켜도 좋다. 지구 평화를 위해 활약하는 영웅적인 주인공들이라는 점이 닮아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그 외에는 성격도 능력도 전혀 다른 인물들인 것 같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여름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의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스파이더맨 시리즈나 크리스토퍼 놀런이 감독을 맡은 배트맨 시리즈는 모두 여름에 개봉했다. 트랜스포머도 마찬가지고 원더우먼 역시 영화로 나올 때 본고장 미국의 개봉일을 여름으로 잡았다. 다이하드3가 처음 시작될 때, 한여름 뉴욕 시내의 풍경을 차례로 보여 주며 흥겨운 ‘서머 인 더 시티(Summer in the City)’ 노래가 흐르는 장면은 여름철 블록버스터 영화를 상징할 만한 명장면으로 잘 알려져 있다.

도대체 왜 대형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는 여름에 개봉하는 것일까? 원래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20세기 초 영화가 처음 선보였을 때 극장 성수기는 여름철보다 오히려 겨울철이었다. 날씨가 추워져 바깥에서 할 놀이가 마땅치 않으니, 실내에서 즐길 수 있는 영화를 보러 사람들이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반대로 가뜩이나 더운 여름철에 갑갑한 실내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영화를 보는 것은 짜증스러운 일에 가까웠다.

상황이 바뀐 것은 에어컨이 도입되면서부터다. 1910년대에 에어컨 개발사들은 장치를 작게 만들지 못해 방 하나를 전부 차지할 정도로 큰 대형 에어컨 설비를 주로 만들어 팔고 있었다. 그러니 가정용 에어컨을 만들어 판다는 것은 먼 미래의 꿈에 가까웠다. 반드시 온도를 낮추고 습기를 낮춰야 할 필요가 있는 특수한 공장이라든가 보존창고 같은 곳에나 에어컨을 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1917년 미국 시카고의 센트럴 파크 극장을 시작으로 에어컨을 설치한 극장이 등장했다. 극장은 애초에 대형 시설이므로 대형 에어컨밖에 없는 시대였다고 해도 설치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에어컨이 설치되자 더운 여름날 극장을 찾은 사람들은 바깥 날씨와는 전혀 다른 시원한 공기에 충격적인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점차 사람들은 더운 날씨를 피해 극장을 찾기 시작했고, 여름철에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개봉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졌다.

극장은 에어컨이라는 기계가 세상에 퍼질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였다. 세계의 극장에 에어컨을 판매하면서 수익을 얻은 에어컨 제조사는 지속적으로 기술을 발전시켜서 가정용·차량용으로 쓸 수 있는 소형 에어컨을 개발해 나갔다. 동시에 극장에서 에어컨을 체험한 사람들은 자신의 일터와 가정에 에어컨을 설치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게 됐다. 그러면서 에어컨은 사람들이 사는 곳 여기저기로 꾸준히 퍼져 나갔다.

에어컨 덕택에 더운 여름철에 태어난 아기들의 생존 확률은 꾸준히 높아졌고, 노약자들이 무더위의 고비를 건강히 넘기기도 한결 쉬워졌다. 싱가포르의 정치인 리콴유가 에어컨이 없었다면 더운 나라인 싱가포르가 결코 선진국이 될 수 없었을 거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근래에는 K2 전차에도 냉방장치가 장착되는 등 우리 군의 전력을 강화하는 데도 에어컨이 한몫했다.

에어컨은 그저 시원한 바람을 보내 주는 단순한 기술인 것 같지만 문화를 바꾸고, 생명을 구하고, 세계를 성장시켰다. 그저 사람을 조금 편하게 해 주는 정도의 대단찮아 보이는 기술이라고 할지라도, 널리 잘 활용되면 세상에 대단히 큰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증거로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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