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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동포 희생·헌신 있었기에 조국 독립 가능했다”

안승회

입력 2020. 08. 13   16:06
업데이트 2020. 08. 13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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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한우성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안창호는 재미동포
홍범도는 고려인…
수많은 재외동포가
청산리전투·봉오동전투 참전
만주 신흥무관학교와
美 캘리포니아 비행학교 설립 등
타국에서 병력 양성 힘써 
 
한반도 밖 독립운동
이들과 분리할 수 없어 
 
찾아가는 무료 교육·원격 강의 등
장병 정신전력 강화 협력 준비도 

 

한우성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은 지난 7일 서울 서초구 재외동포재단 서울사무소에서 “75주년 광복절을 맞아 조국의 독립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재외동포들의 헌신을 장병들이 알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안승회 기자
한우성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은 지난 7일 서울 서초구 재외동포재단 서울사무소에서 “75주년 광복절을 맞아 조국의 독립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재외동포들의 헌신을 장병들이 알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안승회 기자

“일제강점기 우리 재외동포들의 시대정신은 ‘조선의 독립’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인적 구성을 보면 대부분이 재외동포였죠. 많은 독립운동 자금도 재외동포 주머니에서 나왔습니다. 당시 재외동포들은 낯선 타국에서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웠습니다.”

재외동포재단 한우성 이사장은 광복절을 여드레 앞둔 지난 7일 서울 서초구 재외동포재단 서울사무소에서 가진 국방일보와의 인터뷰에서 “75주년 광복절을 맞아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재외동포들의 헌신을 장병들이 알아주길 바란다”며 이같이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우성(맨 오른쪽)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이 서울 국립항공박물관에 전시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비행학교 기념조형물’을 배경으로 임시정부 비행장교였던 고 박희성 참위의 후손들, 원인철(왼쪽 셋째) 공군참모총장, 이계훈(왼쪽 넷째) 31대 공군참모총장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제공=한우성 이사장
한우성(맨 오른쪽)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이 서울 국립항공박물관에 전시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비행학교 기념조형물’을 배경으로 임시정부 비행장교였던 고 박희성 참위의 후손들, 원인철(왼쪽 셋째) 공군참모총장, 이계훈(왼쪽 넷째) 31대 공군참모총장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제공=한우성 이사장


대한민국 독립운동사를 보면 재외동포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런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먼저 재외동포의 정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재외동포는 대한민국 국적을 갖고 외국에 사는 재외국민과 외국 국적을 갖고 외국에 사는 우리 민족인 교포를 총칭하는 말이다. 한반도 밖으로 나간 지 90일 이상 지난 유학생, 주재원 등도 재외국민으로 재외동포에 포함된다. 현재 750만 명의 재외동포가 180여 개 나라에서 살고 있다. 재외국민은 270만 명, 교포는 480만 명 정도다.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민족지도자 안창호 선생은 재미동포, 봉오동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은 고려인이었다. 한반도 밖에서 벌어졌던 독립운동과 재외동포를 연결해 생각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이분들이 재외동포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많은 것 같다. 이름이 알려진 독립운동가를 소개할 때 재외동포라는 단어를 쓰면 불편해하는 국민 정서도 안타깝다. 재외동포라는 개념을 한국인과 외국인 중간쯤에 놓는 이분법적 사고가 문제다. 이분들 외에도 독립을 염원한 무수히 많은 재외동포의 헌신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재외동포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어떤 활동을 했나.

“재외동포와 독립운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조선에 일본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하면서 많은 국민이 한반도 밖으로 나갔다. 이들은 타국에서 침탈된 국권을 되찾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에 참전한 독립투사 대부분이 재외동포였다. 이들은 조국 독립의 꿈을 품고 병력을 양성하기도 했다. 만주에 설립한 신흥무관학교와 미국 캘리포니아에 창설한 윌로우스 비행학교가 대표적이다. 재외동포가 대규모로 발생한 원인 자체가 ‘일제강점’이었고, 그들의 시대정신이 ‘독립운동’이었다.”


임시정부가 세운 비행학교가 인상적이다.

“임시정부는 1920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시에 비행학교·비행대를 창설하고 파일럿을 양성했다. 정식 명칭은 ‘한인 비행사 양성소’. 일제의 억압이 닿지 않는 이곳에서 한인 청년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비행술을 익혔다. 당시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 장군은 공군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비행학교 창설을 계획했다. 쌀농사로 큰돈을 번 재미동포 김종림 선생은 비행학교 설립을 위해 2만 달러를 기부하고 매달 3000달러씩 지원하기로 했다. 현재 가치로 따지면 110억여 원에 이르는 큰 금액이다. 최초의 한인 비행사 양성 학교인 이 비행학교는 대한민국 공군의 출발점이 됐다.”


공군의 뿌리가 독립운동과 임시정부에 있다는 말인데,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나.

“비행학교는 임시정부의 공식적인 군사조직이었다. 헌법상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군이 임시정부 정규군의 법통을 계승하는 것은 당연하다. 공군이 육군 항공대에서 나와 미군으로부터 연락기 10대를 얻어 출발한 군이라는 건 잘못된 지식이다. 공군은 군사적 독립운동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임시정부의 공식적인 정책에 따라 만들어진 군이다. 지난해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대통령이, 지난달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 비행학교 기념조형물 제막식에서 공군참모총장이 “최초의 한인 비행학교인 윌로우스 비행학교가 공군의 기원”이라고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군 통수권자와 공군 수장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처음으로 대한민국 공군의 역사적·법통적 기원에 대한 정의를 명확히 내린 것이다.”


공군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 그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지난 2013년 조국 독립을 위해 몸 바쳤던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를 통해 대한민국 공군의 뿌리와 역사적 위치를 밝혔다. 이후 임시정부가 임명한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장교인 고 박희성 참위의 업적을 국가보훈처에 제출해 공식적으로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했다. 또 보훈처에 건의해 박 참위의 영현을 LA에서 국립현충원으로 모셨다. 당시 공군 지휘부가 공군기, 공군의장대와 함께 최대의 예우를 갖춰 영현을 맞았다. 2012년부터 2016년까지 공군정책발전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공군의 뿌리를 널리 알렸다.”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이 군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우리 군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임시정부 비행학교는 100% 재미동포의 희생과 헌신으로 이뤄졌다.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으로서 이들의 업적을 기리는 것은 당연하다. 올해 개교 100주년을 맞는 비행학교의 역사는 그동안 묻혀 있었다. 최근 10여 년 동안 공군, 국가보훈처 등과 함께 노력해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되찾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군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우리는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역사를 올바르게 물려줘야 할 의무가 있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든 이들을 기억하고 국난 극복의 과거를 직시하는 것은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평화를 지키고 만들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우리 재단은 장병 정신전력 강화를 위해 군과 적극적으로 협력할 준비가 돼 있다. 각 군은 훌륭한 교육시스템을 갖추고 있고 재외동포재단은 국내 최고의 역사 전문가들을 자문위원으로 두고 있다. 두 기관이 협력한다면 장병들에게 더욱더 수준 높은 교육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찾아가는 무료교육 서비스, 원격 강의 등을 통해 장병들의 역사 인식 개선에 힘을 보태고 싶다.”


안승회 기자 < lgiant61@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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