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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9년 日침략 받고 종속… 전쟁 때마다 수탈 아픔

입력 2020. 07. 29   14:49
업데이트 2020. 07. 29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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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슬픔 ③ 슬픔의 섬 오키나와


일본 오키나와의 관광 명소인 만자모(万座毛). 만자모는 바다를 끼고 있는 넓은 벌판을 뜻하며 코끼리 모양을 한 단층과 기암의 모습이 빼어나 관광객들이 꼭 찾는 대표적인 장소다. 사진=이미지투데이
일본 오키나와의 관광 명소인 만자모(万座毛). 만자모는 바다를 끼고 있는 넓은 벌판을 뜻하며 코끼리 모양을 한 단층과 기암의 모습이 빼어나 관광객들이 꼭 찾는 대표적인 장소다. 사진=이미지투데이




1945년 4월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 최대 격전지가 됐다. 동맹국 독일은 항복 직전이었고 일본이 승리하거나 현상을 유지한 채 휴전협상을 벌일 여지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은 항공기에 폭탄을 싣고 미군 함정을 향해 자폭을 시도하는 등 광적인 저항을 지속했다. 


일본 본토에 상륙한 병력이 대기할 공간이 필요했던 미군도 물러서지 않았다. 일본군은 11만의 병력이 궤멸됐다. 그리고 강제 징집한 오키나와 청년 3만 명, 일반 민간인 약 9만4000명이 희생됐고 한반도에서 징집된 노무자와 위안부도 1만 명이 희생됐다. 


미군은 1만4009명의 희생자를 냈고, 38척의 함정이 자살공격으로 침몰했다. 오키나와 전투를 겪은 연합군 지휘부는 만약 일본 본토 점령이 오키나와 전투처럼 진행된다면 70만 명 정도의 사상자가 발생하리라고 예측했다. 


결국 본토 결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키나와 전투는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 됐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오키나와는 미국의 ‘불침항모’로 변모했다. 6·25전쟁 중에 맺어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은 독립을 회복했지만 오키나와는 제외였다.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에서 분리돼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됐다. 섬에는 미군의 거대한 공군기지와 해군기지가 들어섰고,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의 후방기지 역할을 담당했다. 


냉전 시기 내내 오키나와는 동아시아에 주둔한 미군의 전진기지였고, 섬의 경제는 미군에 의존하게 됐다. 


전통적인 마을과 농경지는 군사기지를 중심으로 재구성됐다. 기지 부지로 지정된 지역의 주민들은 기지 주변의 개방지로 강제 이주해야 했다. 


오키나와의 ‘가데나’시는 무려 82%의 면적이 미군기지인 ‘기지도시’다. 과거 오키나와는 ‘비무(非武)의 섬’으로 불릴 정도로 평화로운 곳이었다. 


무역으로 번성한 ‘류큐 왕국’이 지배하던 오키나와는 1609년 일본의 침략을 받고 종속국으로 전락했다. 


그러다가 1872년 이른바 ‘류큐 처분’으로 일본에 병합되기에 이른다. 


일본인들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세금과 징병의 의무를 동일하게 부여하고 차별을 금지한다고 선전했지만, 일본과 언어,문화가 달랐던 오키나와 주민들은 지속적으로 차별받았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벌어지자 일본의 착취는 점차 심해졌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을 인간 방패로 내세웠다. 궁지에 몰리면 주민들의 식량을 빼앗고 학살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3분의 1이 넘는 주민들이 희생됐지만 일본 정부는 독립을 조건으로 오키나와를 군사기지로 내주고 주민들을 외면했다. 


오키나와의 비극적인 역사는 우리의 현대사와도 겹쳐진다. 한반도와 오키나와는 잦은 외침에 시달리다가 일본의 지배를 받았고, 원치 않은 전쟁에 강제로 동원돼 숱한 사람들이 희생됐다.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6·25전쟁은 오키나와 전투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체험이었다. 전쟁 기간 에 섬 전체에는 등화관제가 실시됐고, 소련군이 상륙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주민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다. 


미군은 6·25전쟁에 투입할 공군기들이 주둔할 기지 건설에 박차를 가했고, 여기에 참여한 일본의 기계·건설 기업들은 막대한 달러를 벌어들였다. 


일본 전후 부흥의 기폭제가 된 ‘조선 특수’의 상당 부분은 오키나와 주둔 미군의 수요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일본 기업들이 벌어들인 막대한 달러는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오키나와의 비극적인 역사를 다룬 르포집 『오키나와 노트』(1970)에서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경제특수를 누린 일본의 행태와 오키나와 전투 당시 주민들을 학살한 일본군의 전쟁범죄를 기록하면서 아시아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돈 벌기에 급급한 일본 정부를 비판했다. 


오에 겐자부로는 "오키나와에 대한 무지와 단순화는 아시아에서 벌인 100년 동안의 교활하고 냉혹한 일본인의 행태"라고 적고 있다. 


이 르포집을 발표한 오에 겐자부로는 일본 극우주의자들에게 살해 협박을 받아야 했다. 오키나와 출신 작가들도 ‘비극의 섬’이 된 오키나와의 슬픔을 작품에 담고 있다. 


그들 중 마타요시 에이키의 작품 『긴네무 집』(1981)에는 전후 오키나와에 잔류한 조선인이 등장해서 눈길을 끈다. 


이 조선인 남자는 오키나와 전투 직전 비행장을 건설하는 노무자로 끌려온 사람이다. 전쟁이 끝난 후 남자는 미군기지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면서 오키나와에 정착했다. 


일본인에게 차별받았던 오키나와 사람들은 조선인 남자를 교묘한 방식으로 차별한다. 학대와 차별을 받은 경험이 다른 약자들을 향한 폭력으로 전환되는 풍경을 제시하면서 작가는 오키나와 전투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일본의 억압으로 고통 받았던 오키나와를 다루면서 자연스럽게 같은 기억을 지닌 한반도로 눈을 돌린다.  


오키나와에 건립된 평화공원에는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겨 놓은 비석이 존재한다. 


이 가운데 한반도 출신의 이름은 447명에 불과하다. 휴양지로 널리 알려진 아름다운 섬 오키나와에는 집단학살로 희생된 자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탑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해안과 동굴에서는 여전히 당시의 유류품과 유골이 발견된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매년 오키나와 전투 희생자를 추모하면서도 일본군의 강요로 집단 자결한 오키나와인의 기록을 교과서에서 삭제한 채 침묵으로 일관한다. 


오에 겐자부로와 오키나와 출신 작가들의 글쓰기는 그 침묵에 맞서는 조용하고도 단호한 저항이다.  <이정현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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