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정전 3년 뒤 발표된 노래
군복이 명예·헌신 상징이던 당시
훈장 달고 고향 돌아온 군인 묘사
가수 황정자, 대중가요로 인기몰이
3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일등상사’는 김 상사였을까 박 상사였을까. 꽃다래끼를 옆구리에 차고 불로초 핀 언덕길을 꼬불꼬불 감아 돌던 큰애기는 몇 살이나 되었을까. 왜 꼬불 길을 걸었을까. 1958년에 일등상사이면 오늘날 상사이다. 군 복무를 15~20년 정도 해야 다다르는 계급이다. 노래 속 일등상사는 6·25전쟁 참전용사일 테다. 그분은 그 전쟁 통에 살아남아서 고향으로 온 것을 보면 푸른색 전투복 가슴팍에 훈장 몇 개쯤을 달고 왔을 것이다. 늠름한 ‘일등상사’의 각 잡힌 어깨와 거무스름한 구릿빛 얼굴이 떠오른다.
노랫말 첫 소절 꽃다래끼는 소쿠리와 망태기와 같은 휴대용 농기구를 말한다. 가늘게 쪼갠 대나무나 짚으로 꼰 새끼줄을 가로 세로로 엮어서 만들었다. 둘러멜 수 있는 끈을 단 경우도 있다. 원형·타원형·사각형도 있었는데, 꽃다래끼는 주로 처녀들이나 아낙들이 옆구리에 차고 다니면서 나물을 캐서 담거나 꽃을 채취해서 담던 것이다. 이것을 옆구리에 낀 처녀는 꽃과 나물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일등상사’에게만 곁눈질은 한다. 아하~, 드디어 눈이 마주쳤다. 사내답고 얌전한 일등상사가 웃음을 건넨다. 사랑이 피어난다. 꽃다래끼와 짝을 이루는 농기구는 망태기·꼴망태·주루막 등이 있고, 망태는 망(網)으로 된 자루(袋)라는 의미의 줄임 말이다. 이 외에도 고향 들녘을 오가시는 어머니·아버지의 거칠거리는 얼굴과 오버랩되는 재래농기구는 많고 많다. 지게·들것·소쿠리·광주리·바구니·길마·걸채·수레·달구지·괭이·가래·삽·써레·쇠스랑 등이 눈앞에 삼삼하다.
일등상사는 부사관(옛날 하사관). 군대 조직 내에서 장교와 병사 중간 신분, 전문적인 기술 및 지식을 겸비한 직업군인으로 전문사관이라고도 한다. 부사관계급은 하사·중사·상사·원사로 나뉜다. 2001년 3월 27일 이전까지는 하사관으로 불렸다. 6·25전쟁 이전 모병제(6·25전쟁 시 징병제) 시절은 특무정사, 정사, 부사, 참사가 현재 계급 원사, 상사, 중사, 하사에 해당된다. 현재의 원사는 1994년 1월 5일부로 일등상사에서 개칭되었다. 이 부사관단을 총괄하고 대표하는 신분이 주임원사다. 대대·연대·사단·군단·군사령부·육군본부·합동참모본부 등 단위부대 부사관 대표, 편제 직위상 지휘관을 보좌하는 특별 참모다.
1950년대는 6·25전쟁 시대였고, 1960년대는 베트남전쟁 시대였다. 그 시절에는 목발을 짚고 다니는 상이용사나 한 손에 쇠붙이 갈고리를 낀 외팔이 용사들이 존경·존중받았다. 군복이 명예와 헌신의 상징이기도 했다. 흙이 묻은 군화(전투화)에 광을 내고, 푸른색 군복에 풀을 먹여 다림질을 하면서 늘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과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가치를 묵념·묵시했었다. 장수전 군명유소불수(將帥戰 君命有所不受)다. 장수가 전쟁터에 임하면 임금님의 명령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손자(중국 춘추시대 전략가)가 말한 장수는 바로 오늘날의 군대다. 군대 지휘관은 전쟁대비와 국가안보를 위한 목적 그 자체가 돼야 한다. 전쟁터에 서 있는 사령관은 통수권자의 전쟁 지휘 권한을 이미 위임받은 자이고, 그 위임의 소명은 전투에서의 승리이다. 이순신(1545~1598) 장군이 바로 그 장수의 푯대다.
전쟁을 서사하는 핵심 단어들은 전투·공적·전사·훈장 등이다. 6·25전쟁이 정전된 지 3년 뒤인 1958년에 발표된 <일등상사> 노래 속의 주인공 가슴에는 훈장 몇 개가 달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꽃다래끼를 허리에 차고, 불로초 핀 언덕길을 꼬불꼬불 감아 돌며 3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사랑하는 님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일등상사의 눈빛만 보였을 것. 가슴속은 얼마나 콩닥거렸을까. 그래서 그 빛나는 훈장은 보이지도 않았을 터.
우리나라 훈장(勳章) 제도 시행은 1900년부터다. 국가나 사회에 공로가 뚜렷한 사람에게 나라에서 그 공적을 표창하기 위하여 수여하는 기장(記章)과 그에 상응하는 증표의 국가문서를 전수하는 제도로 ‘훈장조례’(칙령)를 공포하면서 시행되었다. 처음에는 금척대훈장(무등급)·이화대훈장(무등급)·태극장(8등급)·자응장(8등급) 등이었으나 그 뒤 팔괘장(8등급)·서성대훈장(무등급)·서봉장(8등급)이 추가돼 모두 7종류가 있었다. 이는 세월을 거듭하면서 변경을 거듭한다. 오늘날 사용하는 보국훈장의 등급별 명칭은 통일장·국선장·천수장·삼일장·광복장, 수교훈장은 광화장·흥인장·숭례장·창의장·숙정장 등이다. 문화훈장은 금관·은관·보관·옥관·화관, 새마을훈장은 자립장·자조장·협동장·근면장·노력장, 체육훈장은 청룡장·맹호장·거상장·백마장·기린장, 수교훈장 광화장이 광화대장과 광화장으로 사용된다.
<일등상사> 작곡가 나화랑은 김천 출생, 본명은 조광환(1921~1983), 고려성이라는 예명을 사용한 조경환(1910~1956)의 친동생. 김천의 갑부집 아들이다. 김천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중앙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이후 형 조경환의 주선으로 1942년 폴리돌레코드사에 입사해 처녀작곡한 노래가 <삼각산 손님>, 신인가수 태성호가 불렀다. 그는 백년설의 권유로 가수가 됐지만, 작곡으로 전향해 나화랑·탁소연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으며, KBS전국노래자랑 심사위원을 역임한 딩동댕아저씨 작곡가 임종수의 스승이다. 임종수는 나훈아의 <고향역>(원곡, 차창에 어린 모습)을 작곡 노트 속에서 8년 만에 잠을 깨운 주인공.
이 노래를 부른 가수 황정자는 1959년 <처녀 뱃사공>으로 데뷔해 민요가수 목소리에 신민요풍의 유행가를 불러 6·25전쟁 후 대중가수로서 인기를 받으면서, <봄바람 님바람>, <노래가락 차차차>를 연이어 히트시켰다. 1929년 서울 출생, 본명이 황창순이다. 1947년 김해송의 KPK악단원이 됐고, 1949년 럭키레코드·1954년 도미도레코드 전속가수가 된다. 1958년에는 킹스타·도미도레코드에 이중계약, 1960년 아세아레코드 전속가수가 된다.
그녀는 1969년 40세로 사망했는데, 원인은 미명이다. <살랑춘풍>, <고향마차>, <노처녀의 봄>, <꼬공꽁 신세>, <오동동 타령>, <개나리 순정>, <남원의 봄 사건>, <황초불 타는 밤>, <처녀 뱃사공>, <마도로스 정자>, <물 긷는 처녀>, <노들강 600년> 등을 남겼다. 한복남·윤부길·황정자는 1959년 <처녀 뱃사공>을 히트시키며 유행가의 명콤비가 됐다.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이름과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지키기 위해 군복을 입고 계신 모든 현역 군인들과 군 복무 후 예비역이라는 신분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모든 분들이 노래 속 주인공이다.
6·25전쟁 정전 3년 뒤 발표된 노래
군복이 명예·헌신 상징이던 당시
훈장 달고 고향 돌아온 군인 묘사
가수 황정자, 대중가요로 인기몰이
3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일등상사’는 김 상사였을까 박 상사였을까. 꽃다래끼를 옆구리에 차고 불로초 핀 언덕길을 꼬불꼬불 감아 돌던 큰애기는 몇 살이나 되었을까. 왜 꼬불 길을 걸었을까. 1958년에 일등상사이면 오늘날 상사이다. 군 복무를 15~20년 정도 해야 다다르는 계급이다. 노래 속 일등상사는 6·25전쟁 참전용사일 테다. 그분은 그 전쟁 통에 살아남아서 고향으로 온 것을 보면 푸른색 전투복 가슴팍에 훈장 몇 개쯤을 달고 왔을 것이다. 늠름한 ‘일등상사’의 각 잡힌 어깨와 거무스름한 구릿빛 얼굴이 떠오른다.
노랫말 첫 소절 꽃다래끼는 소쿠리와 망태기와 같은 휴대용 농기구를 말한다. 가늘게 쪼갠 대나무나 짚으로 꼰 새끼줄을 가로 세로로 엮어서 만들었다. 둘러멜 수 있는 끈을 단 경우도 있다. 원형·타원형·사각형도 있었는데, 꽃다래끼는 주로 처녀들이나 아낙들이 옆구리에 차고 다니면서 나물을 캐서 담거나 꽃을 채취해서 담던 것이다. 이것을 옆구리에 낀 처녀는 꽃과 나물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일등상사’에게만 곁눈질은 한다. 아하~, 드디어 눈이 마주쳤다. 사내답고 얌전한 일등상사가 웃음을 건넨다. 사랑이 피어난다. 꽃다래끼와 짝을 이루는 농기구는 망태기·꼴망태·주루막 등이 있고, 망태는 망(網)으로 된 자루(袋)라는 의미의 줄임 말이다. 이 외에도 고향 들녘을 오가시는 어머니·아버지의 거칠거리는 얼굴과 오버랩되는 재래농기구는 많고 많다. 지게·들것·소쿠리·광주리·바구니·길마·걸채·수레·달구지·괭이·가래·삽·써레·쇠스랑 등이 눈앞에 삼삼하다.
일등상사는 부사관(옛날 하사관). 군대 조직 내에서 장교와 병사 중간 신분, 전문적인 기술 및 지식을 겸비한 직업군인으로 전문사관이라고도 한다. 부사관계급은 하사·중사·상사·원사로 나뉜다. 2001년 3월 27일 이전까지는 하사관으로 불렸다. 6·25전쟁 이전 모병제(6·25전쟁 시 징병제) 시절은 특무정사, 정사, 부사, 참사가 현재 계급 원사, 상사, 중사, 하사에 해당된다. 현재의 원사는 1994년 1월 5일부로 일등상사에서 개칭되었다. 이 부사관단을 총괄하고 대표하는 신분이 주임원사다. 대대·연대·사단·군단·군사령부·육군본부·합동참모본부 등 단위부대 부사관 대표, 편제 직위상 지휘관을 보좌하는 특별 참모다.
1950년대는 6·25전쟁 시대였고, 1960년대는 베트남전쟁 시대였다. 그 시절에는 목발을 짚고 다니는 상이용사나 한 손에 쇠붙이 갈고리를 낀 외팔이 용사들이 존경·존중받았다. 군복이 명예와 헌신의 상징이기도 했다. 흙이 묻은 군화(전투화)에 광을 내고, 푸른색 군복에 풀을 먹여 다림질을 하면서 늘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과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가치를 묵념·묵시했었다. 장수전 군명유소불수(將帥戰 君命有所不受)다. 장수가 전쟁터에 임하면 임금님의 명령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손자(중국 춘추시대 전략가)가 말한 장수는 바로 오늘날의 군대다. 군대 지휘관은 전쟁대비와 국가안보를 위한 목적 그 자체가 돼야 한다. 전쟁터에 서 있는 사령관은 통수권자의 전쟁 지휘 권한을 이미 위임받은 자이고, 그 위임의 소명은 전투에서의 승리이다. 이순신(1545~1598) 장군이 바로 그 장수의 푯대다.
전쟁을 서사하는 핵심 단어들은 전투·공적·전사·훈장 등이다. 6·25전쟁이 정전된 지 3년 뒤인 1958년에 발표된 <일등상사> 노래 속의 주인공 가슴에는 훈장 몇 개가 달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꽃다래끼를 허리에 차고, 불로초 핀 언덕길을 꼬불꼬불 감아 돌며 3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사랑하는 님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일등상사의 눈빛만 보였을 것. 가슴속은 얼마나 콩닥거렸을까. 그래서 그 빛나는 훈장은 보이지도 않았을 터.
우리나라 훈장(勳章) 제도 시행은 1900년부터다. 국가나 사회에 공로가 뚜렷한 사람에게 나라에서 그 공적을 표창하기 위하여 수여하는 기장(記章)과 그에 상응하는 증표의 국가문서를 전수하는 제도로 ‘훈장조례’(칙령)를 공포하면서 시행되었다. 처음에는 금척대훈장(무등급)·이화대훈장(무등급)·태극장(8등급)·자응장(8등급) 등이었으나 그 뒤 팔괘장(8등급)·서성대훈장(무등급)·서봉장(8등급)이 추가돼 모두 7종류가 있었다. 이는 세월을 거듭하면서 변경을 거듭한다. 오늘날 사용하는 보국훈장의 등급별 명칭은 통일장·국선장·천수장·삼일장·광복장, 수교훈장은 광화장·흥인장·숭례장·창의장·숙정장 등이다. 문화훈장은 금관·은관·보관·옥관·화관, 새마을훈장은 자립장·자조장·협동장·근면장·노력장, 체육훈장은 청룡장·맹호장·거상장·백마장·기린장, 수교훈장 광화장이 광화대장과 광화장으로 사용된다.
<일등상사> 작곡가 나화랑은 김천 출생, 본명은 조광환(1921~1983), 고려성이라는 예명을 사용한 조경환(1910~1956)의 친동생. 김천의 갑부집 아들이다. 김천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중앙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이후 형 조경환의 주선으로 1942년 폴리돌레코드사에 입사해 처녀작곡한 노래가 <삼각산 손님>, 신인가수 태성호가 불렀다. 그는 백년설의 권유로 가수가 됐지만, 작곡으로 전향해 나화랑·탁소연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으며, KBS전국노래자랑 심사위원을 역임한 딩동댕아저씨 작곡가 임종수의 스승이다. 임종수는 나훈아의 <고향역>(원곡, 차창에 어린 모습)을 작곡 노트 속에서 8년 만에 잠을 깨운 주인공.
이 노래를 부른 가수 황정자는 1959년 <처녀 뱃사공>으로 데뷔해 민요가수 목소리에 신민요풍의 유행가를 불러 6·25전쟁 후 대중가수로서 인기를 받으면서, <봄바람 님바람>, <노래가락 차차차>를 연이어 히트시켰다. 1929년 서울 출생, 본명이 황창순이다. 1947년 김해송의 KPK악단원이 됐고, 1949년 럭키레코드·1954년 도미도레코드 전속가수가 된다. 1958년에는 킹스타·도미도레코드에 이중계약, 1960년 아세아레코드 전속가수가 된다.
그녀는 1969년 40세로 사망했는데, 원인은 미명이다. <살랑춘풍>, <고향마차>, <노처녀의 봄>, <꼬공꽁 신세>, <오동동 타령>, <개나리 순정>, <남원의 봄 사건>, <황초불 타는 밤>, <처녀 뱃사공>, <마도로스 정자>, <물 긷는 처녀>, <노들강 600년> 등을 남겼다. 한복남·윤부길·황정자는 1959년 <처녀 뱃사공>을 히트시키며 유행가의 명콤비가 됐다.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이름과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지키기 위해 군복을 입고 계신 모든 현역 군인들과 군 복무 후 예비역이라는 신분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모든 분들이 노래 속 주인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