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종교와삶

[이경훈 종교와 삶] 대한민국을 밝혀주는 환한 등불

입력 2020. 07. 14   16:20
업데이트 2020. 07. 14   17:00
0 댓글
이경훈 육군미사일사령부 군종참모·목사·대위
이경훈 육군미사일사령부 군종참모·목사·대위

‘코로나19’의 위기 속에서 우리 국군 장병들이 방역, 소독, 검역, 방역물자 운송 등 수많은 분야에서 귀한 봉사를 했다. 나에게는 국군간호사관학교 60기 졸업생 75명을 비롯한 군 의료진이 혼신의 힘을 다해 환자들을 치료한 일이 가장 특별하게 다가왔다. 왜냐하면 2년 동안 국군양주병원에서 근무하며 군 의료진의 헌신을 곁에서 지켜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의료 역사를 들여다보면 많은 민족의 등불이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빛을 밝혀 주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구한말에 입국한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들은 의료, 교육, 복지 사업을 통해 조선 사람들을 진심으로 돕고자 했다. 알렌 선교사의 건의를 고종 황제가 받아들여 1885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광혜원(제중원으로 개칭)이 세워졌다. 제중원이 세워지던 그해 우리나라는 콜레라가 창궐하는 위기를 맞았다. 당시에 의학 지식이 있던 선교사들은 콜레라 예방법을 알려주었지만 사람들은 듣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 후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일본군에 의해 콜레라가 퍼져 나갔다. 제중원 의사였던 에비슨 선교사와 장로교 목사였던 언더우드 선교사는 백성들을 계몽하기 시작했다. 한글로 거리마다 방을 붙여서 콜레라 예방법을 전했다. 그들의 도움으로 백성들은 콜레라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국 간호학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있다. 바로 서서평(Elisabeth J. Shepping) 선교사다. 그녀는 일제 강점기,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던 조선 백성들을 돕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수양딸 13명, 나병 환자의 아들 1명을 입양해 기른 ‘조선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일제가 나환자 말살 정책을 폈을 때, 조선총독부까지 나환자 530여 명과 행진하여 소록도 한센병 요양시설을 허락받기도 했다. 그가 별세했을 때 그의 침대 머리맡에는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Not Success, But Service)’라는 글귀가 있었다.

코로나19의 위기 속에서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이 훌륭하다고 보도됐는데, 우리나라 의료보험제도를 있을 수 있게 한 분이 바로 장기려 박사다. 그는 1932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의사가 된 수재였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영양실조와 전염병에 시달리던 사람들을 위해 부산의 한 교회 창고를 빌려 ‘복음진료소’라는 이름으로 무료 진료를 시작했다. 지역민들은 장 박사의 헌신적인 봉사에 감동했고, 시민 모금으로 복음병원의 건물을 짓게 됐다. 그는 1969년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만들었고, 정부에서 이 협동조합을 모델로 의료보험제도를 시작했다. 그는 평생 집 한 채도 소유하지 않고 고신대 복음병원 옥상 사택에서 살았다. 청빈한 삶을 살면서 환우들을 진심으로 돌보고 치료했던 그의 삶은 참의사의 길을 밝혀주고 있다.

코로나19의 위기 속에서 국민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의료진과 이를 도운 장병들의 헌신에 깊은 감사 드린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