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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사 7월10일] 1951년 6·25전쟁 첫 휴전회담 개성 내봉장서 열려

신인호

입력 2020. 07. 07   13:25
업데이트 2020. 07. 07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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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휴전회담 본회의가 열린 개성의 내봉장 전경. 사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첫 휴전회담 본회의가 열린 개성의 내봉장 전경. 사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6·25전쟁이 발발한 지 1년이 지날 즈음부터 휴전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더니 1951년 7월 8일 예비회담에 이어 마침내 7월 10일 세계가 주시하는 가운데 첫 휴전회담 본회담이 개최됐다. 전쟁 발발 381일차 되는 날이었다.

휴전협상 테이블은 소련이 제의하고 미국이 동의하는 형식으로 마련됐다. 그 이전에도 휴전을 바라는 정치적인 발언들이 있었지만 보다 직접적인 것으로, 6월 27일 야코프 말리크(Yakov Alexandrovich Malik) 주(駐)유엔 소련대사가 제의한 것이다.

트루먼(Harry S. Truman) 미 대통령은 참전 유엔군들도 소련의 이 제의에 동의하자 6월 29일 리지웨이(Matthew Bunker Ridgway) 유엔군사령관에게 휴전에 관련한 교섭을 가질 것을 지시했다. 이에 리지웨이 사령관은 6월 30일 공산군측에 원산 앞바다의 덴마크 군함에서 휴전협상을 시작하자고 제의했고, 7월 1일 북한 김일성과 중국 펑더화이(彭德懷 1898 ~ 1974)는 회담 장소를 개성으로 하자고 수정 제의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이런 움직임을 격렬히 반대했다.

회담장으로 정해진 곳은 개성 ‘내봉장(來鳳莊)’이었다. 내봉장은 대청마루와 방들 사이를 연결한 99칸짜리 멋진 한옥으로 일제강점기 때 고급 요리점으로 유명했다. 회담 당일에도 현관에는 내봉장이라는 작은 간판이 걸려있었다. 정원을 지나면 정자가 있고 사랑채가 ㄱ자형을 이루고 있는데 이 안채가 바로 회담장이었다. 북한측은 UN하우스라며 내봉장에서 동쪽으로 200m쯤 거리에 위치한 인삼장(人蔘莊)을 기자단 등의 편의시설로 제공했다.

회담에는 유엔군측에서 수석대표 조이(Charles Turner Joy) 해군중장과 알레이 버크(Arleigh Albert Burke) 해군소장, 로렌스 크레이기(Laurence Carbee Craigie ) 공군 소장, 헨리 호데스(Henry Hodes), 백선엽 육군소장이 참석했으며 공산측에서는 남일을 수석대표로 하고 이상조 소장, 장평산 소장, 떵화(鄧華) 상장, 셰팡(解方) 소장이 북한군과 중공군 대표로 참석했다.

내봉장은 아군측 문산에서 가자면 개성 시가지를 통하지 않고 직접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날 공산측은 북한군을 태운 트럭 3대가 유엔군 대표단 행렬을 개성으로 인도하면서 개성 시내를 천천히 돌았다. 유엔군 대표단 지프에는 백기가 달려 있었다. 백기를 다는 것이 합의사항이었으나 공산군 측은 교묘하게 이를 마치 항복사절인양 이용하는 듯했다. 유엔군측은 뒤늦게 그 의도를 깨달았다.

이날 만남 성격은 상견례였지만 ‘지프 백기’에서 보듯 공산군측이 유엔군측을 자극하는 심리전이 보이지 않게 전개돼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당시 상황을 보도한 기사와 회고록 등 자료에 의하면, 조이 해군중장과 북한 남일은 쌍방 대표로서 뜰에서 만났으나 악수 조차 않고 회의장에 들어가 서로 신임장을 주고 받았다.

조이 중장이 먼저 개회사 발언을 한 후 착석했다. 이때 유엔군측은 공산군측을 약간 올려다보는 자세를 취하게 됐는데, 의자가 공산군측 것보다 10cm나 낮았던 것이다. 오후에 회담이 속개되었을 때는 회담장 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탁상용 유엔기 대신 북한기가 놓여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날 첫 회담은 하오 4시 1분 끝났다. UN대표 일행은 헬리콥터로, 신문기자는 트럭으로 복귀했다. 이튿날인 7월 11일부터 본격적인 휴전회담은 시작됐다. 휴전을 위해 선행돼야 할 군사적인 문제만을 다루자는 유엔군측과는 달리 한반도로부터 외국 군대의 철수 문제 등을 우선적으로 토의하자는 등 정치적 주장만을 앞세우는 공산군측의 주장이 맞섬에 따라 7월 26일이 되어서야 협상의제와 토의순서를 합의할 수 있었다.

이렇듯 회담의 진행은 순탄치 못했다. 3개월쯤 지난 10월 7일 회담 장소가 안전상의 이유로 널문리(판문점)로 변경되는 등 결국 2년여가 지난 1953년 7월 27일에 이르러 ‘정전협정’이 조인됐다. 


북한측이 UN하우스라며 기자단에게 편의시설로 제공한 인삼장(人蔘莊). 내봉장에서 동쪽으로 200m쯤 거리에 위치했었다. 사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북한측이 UN하우스라며 기자단에게 편의시설로 제공한 인삼장(人蔘莊). 내봉장에서 동쪽으로 200m쯤 거리에 위치했었다. 사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신인호 기자 < idmz@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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