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건축, 전쟁사를 말하다

오각형… 美 최강 국방력의 상징이 되다

입력 2020. 06. 12   17:32
업데이트 2020. 06. 14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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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미국의 펜타곤


오각형 모양의 국방부 청사
세계 최대 규모 사무용 건물
2차 대전 중 착공해 1943년 완공
냉전시대 소련의 공격 제1목표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 열리기도
9·11테러 피해로 이라크전 도화선

펜타곤 전경.   사진=www.wuwm.com
펜타곤 전경. 사진=www.wuwm.com
 펜타곤(The Pentagon)은 미국의 군사 정책을 총괄하고 육군·해군·공군과 통합 참모본부가 있는 국방부 청사다. 오각형의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어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군사 건축물이기도 하다. 이곳은 워싱턴의 포토맥 강에서 왼편으로 1.2㎞ 떨어져 있고 위로는 알링턴 국립묘지, 아래로는 로널드 레이건 워싱턴 내셔널 공항이 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9월 공사를 시작해 1943년 1월 완공됐다. 펜타곤은 냉전시대에는 소련의 핵미사일 공격 제1목표였고 , 베트남전쟁(1960~1975) 때는 반전을 외치는 시위 참가자들의 항의 중심지가 됐다. 2001년 9월 11일 이슬람 테러 조직에 납치된 아메리칸 항공기가 이곳으로 추락해 이라크전쟁(2003~2011)의 도화선이 됐다. 현재 펜타곤은 군인 2만5000여 명과 지원 인력 3000여 명이 근무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사무용 건물이다.



군 업무 총괄 위해 1941년 9월 11일 착공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의 육군을 담당하는 전쟁부(War Department, 국방부의 전신)는 워싱턴의 내셔널 몰에 있는 뮤니션 빌딩에 있었다. 뮤니션 빌딩은 링컨기념관 앞 호수의 바로 북쪽에 있었는데, 옆에는 해군본부가 자리했다. 2만4000명의 전쟁부 직원들은 워싱턴 내의 17개 건물에 흩어져 있었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전쟁부의 규모도 커져 직원 수는 3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됐다. 이에 군 업무를 한곳에서 총괄하는 새 건물이 필요했다.

건설 예정지로 알링턴 농장부지가 선정됐다. 이곳은 길쭉한 오각형 형태로 이에 맞게 건축물이 설계됐다. 하지만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층수가 높은 국방부 건물을 여기에 세우면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워싱턴 시가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남쪽에 있는 워싱턴-후버 공항 부지로 변경했다. 건물을 새로 설계하려면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드는 데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기존 설계를 마음에 들어 했기에 오각형인 구조를 유지한 채로 재설계를 하면서 펜타곤의 공사가 1941년 9월 11일에 시작됐다. 미 육군 브레혼 소머벨(1892~1955) 준장이 총감독을 했고 레슬리 그로브스(1896~1970) 대령이 건설 책임을 맡았다.
펜타곤의 건설 총감독을 맡은 미국 육군 브레혼 소머벨(1892~1955). 훗날 대장으로 전역했다.사진=www.findagrave.com
펜타곤의 건설 총감독을 맡은 미국 육군 브레혼 소머벨(1892~1955). 훗날 대장으로 전역했다.사진=www.findagrave.com


펜타곤 건설 책임을 맡았던 미국 육군 레슬리 그로브스(1896~1970). 그는 물리학자 오펜하이머와 함께 원자폭탄을 만드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로 임명됐다. 이후 육군 중장으로 전역했다.  사진=readtiger.com
펜타곤 건설 책임을 맡았던 미국 육군 레슬리 그로브스(1896~1970). 그는 물리학자 오펜하이머와 함께 원자폭탄을 만드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로 임명됐다. 이후 육군 중장으로 전역했다. 사진=readtiger.com

68만9000톤 모래·자갈 이용해 건설

전쟁으로 부족해진 강철 대신 인근 포토맥 강에서 68만9000톤의 모래와 자갈을 이용, 4만1000개의 콘크리트 말뚝을 포함해 건물의 내외부가 만들어졌다. 펜타곤은 공식적으로 1943년 1월 15일에 문을 열었다. 이곳은 높이 23m로 지하 2층부터 5층까지 있으며, 총 복도 길이는 총 28.2㎞에 달한다. 건물 면적은 11만6000㎡(3만5090평),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라고 불리는 중앙 안뜰의 면적은 2만1000㎡(6120평)다.



6·25전쟁 때 펜타곤에 3만3000명 근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펜타곤을 퇴역 군인 관리를 위한 병원이나 대학 건물로 변경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소련과 냉전이 시작되면서 높은 수준의 군사 시설로서 중요성이 대두됐다. 1947년 9월 미국 의회는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군사 조직 개편을 주도하는 국가 안보법을 통과시켜 효율적인 군 정책 수립과 관리를 위해 육·해·공 3군을 통합하고 이를 총괄할 기구로 국방부를 설립했다. 펜타곤은 이를 모두 아우르는 정부 청사 건물이 됐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면서 6·25전쟁(1950~1953)이 발발한 후, 펜타곤에 머무는 국방부 직원은 3만3000명에 이르렀다. 6·25전쟁이 끝날 무렵, 펜타곤은 전 세계에서 미국의 군사적인 상징으로 부각됐다.

펜타곤은 1960년대 후반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시위의 중심지가 됐다. 1967년 2월 15일 2500명으로 조직된 ‘평화를 위한 여성 파업’ 단체는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의 집무실 밖에서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를 벌였다. 그해 10월 21일 약 3만5000명의 반전 시위대가 이곳에서 약 2500명의 연방군과 대치하기도 했다.

2001년 9·11 테러 때 피해를 입은 펜타곤의 모습.  사진=www.britannica.com
2001년 9·11 테러 때 피해를 입은 펜타곤의 모습. 사진=www.britannica.com


2001년 9·11테러 때 펜타곤에 항공기 충돌, 미국의 대테러 전쟁으로 이어져

펜타곤 건축 시작일로부터 60년 뒤인 2001년 9월 11일 아메리칸 항공 소속 77번 여객기가 5명의 이슬람 테러범들에게 납치돼 펜타곤 서쪽의 4번과 5번 복도 사이에 있는 E동 건물로 충돌해 펜타곤 직원 125명이 숨지고 항공기 탑승객 59명이 사망했다. 9·11테러는 1812년 전쟁(1812~1815) 중 영국과 캐나다인들에 의해 워싱턴이 불타버린 이래 미국 본토에 대한 최초의 외부 공격으로 2800∼3500여 명의 무고한 사람이 생명을 잃었다. 미국은 이슬람 테러리즘과의 전쟁에 돌입해 아프가니스탄을 공습하고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 오사마 빈 라덴이 2011년 미군에 의해 사살될 때까지 대테러 전쟁을 벌였다.

지난 2008년 개방된 펜타곤 추모공원은 테러 공격을 당했던 서쪽 건물 앞에 건설됐는데, 5명의 테러범을 제외한 펜타곤과 항공기의 희생자 184명을 상징하는 184개의 벤치로 구성됐다. 입구에는 기념비 두 개와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오늘날 펜타곤은 최강국인 미국의 핵심 군사 시설로 위상을 떨치고 있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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