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건축, 전쟁사를 말하다

전쟁범죄 참혹함 증언하는 나치의 첫 ‘죽음의 수용소’

입력 2020. 06. 05   17:35
업데이트 2020. 06. 07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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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오스트리아의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


열악한 환경·가혹한 노동으로 악명
대량학살 목적으로 한 ‘절멸 수용소’
체제 반항자·유대인 등 19만 명 수감
7년 동안 9만5000명 이상 사망 추정
수용소 해방 30주년에 박물관 개관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 전경. 사진=www.private-tour-linz.com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 전경. 사진=www.private-tour-linz.com
1942년 나치에 의해 촬영된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의 ‘죽음의 계단’(왼쪽)과 현재의 모습.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의 수용자들은 186개의 계단에 약 50kg의 짐을 싣고 옮겼다. 지친 수감자들이 쓰러지면 앞에 있는 다른 수감자들도 넘어지는 도미노 효과로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관광객이 쉽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계단을 다듬고 곧게 폈지만 그 당시에는 기울어지고 미끄러웠다.  

 사진=www.britannica.com/dissolve.com
1942년 나치에 의해 촬영된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의 ‘죽음의 계단’(왼쪽)과 현재의 모습.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의 수용자들은 186개의 계단에 약 50kg의 짐을 싣고 옮겼다. 지친 수감자들이 쓰러지면 앞에 있는 다른 수감자들도 넘어지는 도미노 효과로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관광객이 쉽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계단을 다듬고 곧게 폈지만 그 당시에는 기울어지고 미끄러웠다. 사진=www.britannica.com/dissolve.com

오스트리아 오버외스터라이히 주의 대표도시인 린츠에서 동쪽으로 약 20㎞ 떨어진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Mauthausen Concentration Camp)는 1938년 나치 독일이 세운 첫 ‘죽음의 강제수용소’다. 이곳은 독일이 점령지에 만든 1만5000여 개의 강제수용소 가운데 ‘노동에 의한 몰살’이라는 원칙에 따라 운영된 절멸 수용소(대량학살을 목적으로 하고, 나치스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안에 설립한 강제수용소의 일종) 중 하나로, 열악한 환경과 가혹한 노동으로 수감자들의 사망률이 높았다.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는 나치 체제에 반항했던 독일인들과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등을 수감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폴란드인, 유대인, 소련군 포로, 체코인, 스페인 공화주의자, 집시, 동성애자, 종교인 등 유럽의 40개국 이상의 사람들이 끌려왔다. 1945년 5월 미군에 의해 해방되기 전까지 7년 동안 마우트하우젠에 수감된 19만 명 중에 최소 9만500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수용소 내부에는 가스실, 화장터 등이 남아 있어 전쟁범죄의 참혹함을 그대로 증명한다.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 합병 후 건축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로 분할되면서 17~18세기 유럽을 주름잡던 강대국에서 소국으로 전락했다. 오스트리아 태생인 히틀러는 1933년 독일 총리로 취임하면서 오스트리아 나치당원들이 폭력에 의한 정권 탈취를 통해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병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5년 뒤인 1938년 3월 12일 독일이 오스트리아로 진군해 같은 해 4월 10일 오스트리아 병합을 선언하면서 현실이 됐다.

1938년 8월 8일 나치는 오스트리아에 새로운 노동수용소를 건설하기 위해 독일이 가장 처음 지었던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한 무리의 수용자들을 조용한 시골 마을인 마우트하우젠으로 이송했다. 이곳은 근처에 화강암 채석장이 있는 데다 린츠와의 근접성 때문에 강제수용소 부지로 선정됐다. 나치에 반대하던 독일인과 오스트리아인, 유대인들의 강제노동을 통해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가 건축됐다. 정치적 반대자들의 처형이 주목적이었다. 강제수용소의 운영은 나치 친위대(Schutzstaffel)가 맡았다. 1938년 말 수감자 수는 1080명이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유럽 전역의 전쟁터에서 마우트하우젠으로 끌려가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는 유럽 전역의 수용자를 수감하면서 독일이 세운 가장 큰 수용소 중 하나가 된다. 아직 미완성 중임에도 수감자가 3000명으로 증가하자, 1939년 12월 나치는 마우트하우젠에서 약 4.5㎞ 떨어진 구센에 강제수용소 건설을 명령했다. 6000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고안된 구센 제1수용소는 1940년 4월 첫 수감자를 수용한 다음에 폴란드 정치범을 대상으로 그해 5월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됐다. 구센 제2수용소는 1944년 3월에 문을 열었으며, 구센 제3수용소는 1944년 12월에 완성됐다.

독일의 승전에 따라 수용자들도 늘었다. 스페인 내전(1936~1939)에서 프랑코 정권의 승리 후 프랑스로 망명한 스페인 공화당원들은 1940년 6월 프랑스가 개전 한 달 만에 패배하자, 독일군에 체포되거나 나치에 협력한 비시 정부에 붙잡혀 마우트하우젠으로 보내졌다가 구센으로 이감됐다. 1941년 4월 독일은 이탈리아와 함께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한 후 나치에 저항하는 약 1500명의 슬로베니아인을 마우트하우젠으로 보냈다. 절정은 독소전쟁(1941∼1945)이다. 독일은 1941년 6월 22일 선전포고 없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수많은 소련군 포로들을 잡아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나치는 1941년 마우트하우젠에 수용자들을 체계적으로 학살하기 위해 가스실과 기타 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해 1942년 초 완료했다. 소련군 포로들은 독가스를 이용한 첫 번째 희생자가 됐다. 전쟁 중에 붙잡힌 네덜란드와 영국 연합군 요원 47명, 미국 전략사무국 요원 13명 등도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1945년 5월 5일 미군에 의해 약 4만 명의 수감자 해방

전쟁이 끝날 무렵 연합군과 소련의 붉은군대가 진군하면서 독일 점령지에 있는 강제수용소를 점차 해방하자, 나치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를 비롯한 작센하우젠, 그로스 로센의 수용자들을 최전선인 마우트하우젠으로 보냈다. 이미 인구 과밀화와 식량 부족을 겪던 마우트하우젠은 수용자들이 늘어날수록 죽음도 더 늘었다. 5월 5일 미국의 제11기갑사단이 마우트하우젠과 구센의 강제수용소에 있는 약 4만 명의 수감자들을 해방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마우트하우젠은 소련의 점령 지역 일부로 지정됐다. 소련은 이곳을 붉은군대의 막사로 사용했다. 1946년에서 1947년 사이에 강제수용소는 붉은군대와 지역 주민들에 의해 많은 시설이 해체됐다. 1947년 6월 20일 소련은 마우트하우젠을 적합한 기념관으로 바꾸는 조건으로 오스트리아에 인계했다. 오스트리아는 1949년 마우트하우젠을 국가 기념관으로 선포했다. 이후 오스트리아 브루노 크라이스키 총리는 수용소 해방 30주년을 맞은 1975년 5월 3일 마우트하우젠 박물관을 개관했다. 2003년에는 2845㎡(860.6평) 규모의 방문객 센터가 추가로 설립됐다.

박물관으로 변모한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는 오늘도 꿋꿋이 나치의 만행을 증언하고 있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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