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한국전쟁 70주년, 대중가요로 본 6.25전쟁

흥남부두서 손 놓친 내 딸 금순이, 사무친 그리움 ‘절절’

입력 2020. 05. 29   16:52
업데이트 2020. 05. 31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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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굳세어라 금순아 - 강사랑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


피난민 실화 바탕으로 1953년 만든 곡
1·4후퇴와 영도다리… 상징 배경 가사에 담아
‘부산으로 와라, 영도다리서 만나자’던 가족들
30년 후 이산가족 찾기 통해 극적 재회하기도 

 

흥남철수작전 때 피난민들이 승선하는 모습. 국방DB
흥남철수작전 때 피난민들이 승선하는 모습. 국방DB

<굳세어라 금순아>는 6·25전쟁 중 1·4후퇴작전의 일환이었던 ‘흥남철수’에 얽힌 실제 사연을 유행가요로 역은 곡이다. 일련의 1·4후퇴작전은 서부전선에서는 1950년 12월 4일 평양 철수가 시작이었고 12월 14일 대동강철교 폭파로 이어졌다. 이 폭파 장면을 찍은 사진이 1951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동부전선의 후퇴작전은 흥남철수가 피날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발발한 전쟁에서 낙동강방어선까지 밀렸던 국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북진을 감행한다. 10월 1일 국군3사단이 양양지역(양양군 현북면 잔교리) 38선을 최초로 돌파하고 북진을 계속하면서 통일을 눈앞에 뒀지만, 그해 10월 19일 중공의 팽덕회가 북한군을 지원하기 위해 92만여 명을 이끌고 인해전술(人海戰術)로 공격해 온다. 당시 팽덕회부대는 심양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국군과 유엔군은 피눈물을 머금고 후퇴작전을 해야 했으며, 그 일환이 흥남철수다. ‘1·4후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1951년 1월 4일이 공산군에게 다시 서울을 빼앗긴 날이기 때문이다.

중공군이 사용한 인해전술은 전투 투입 병력에 제한을 두지 않고, 병력 피해를 고려하지 않으면서 파상적으로 공격·돌파·포위·침투를 병행하는 전술이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많은 병력 투입으로 돌파구를 형성해 방어지역을 분단·고립시키는 일종의 제파식(梯波式) 공격전술을 사용한다. 6·25전쟁 당시 방한복을 착용하고 소총과 방망이수류탄을 든 중공군은 주로 야간에 나팔·북·피리·꽹과리와 함성 등으로 국군과 유엔군에게 심리적인 불안감을 조장하면서 공격 방향을 기만한 다음, 전혀 다른 방향에서 여러 제파의 대병력으로 물밀 듯이 공격해 왔다.

흥남철수작전은 1950년 12월 15일부터 24일까지 10일간 국군과 유엔군이 흥남항구를 통해 해상으로 철수한 작전이다. 유엔군사령부는 12월 8일 흥남 철수 지시를 내렸고, 이에 약 10만 명에 이르는 미군(10군단)과 한국군(1군단)이 흥남에 집결했으며, 이들은 12월 15일부터 24일까지 열흘에 걸쳐 193척의 선박을 타고 남쪽으로 철수했다. 특히 당시 철수하는 미군과 한국군을 따라 10만여 명에 이르는 피난민도 남쪽으로 탈출했다. 흥남을 떠난 마지막 배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2월 23일 배에 실려 있던 군수물자 25만t을 버리고 1만4000명의 피난민을 태웠다. 메러디스호는 이틀간의 항해 끝에 12월 25일 거제도에 무사히 도착해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불렸다. 경남 거제시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는 흥남철수작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 작전을 통해 10만5000명의 병력과 10만 명의 피난민은 물론 1만7000대의 차량, 35만 톤의 군수품이 안전하게 남한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당시 흥남부두에 있던 금순이와 그의 어머니는 혼잡한 상황에서 붙잡고 있던 손을 놓치면서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함께 타지 못한다. “부산으로 와라. 영도다리 위에 보름달이 뜨면 만나자.” 이때 헤어진 금순이와 엄마는 1983년, KBS에서 휴전 이후 30년 만에 실시한 ‘아직도 이런 슬픔이,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을 통해 극적으로 만난다. 전쟁 통에 헤어진 혈육, 그 실제상황과 슬픔을 담은 노래가 바로 <굳세어라 금순아>다.

부산 피난 시절, 이산가족들은 매일 밤 영도다리에 모였다. 당시 부산에서 피난살이 하던 인구는 주민등록상으로 40만, 1·4후퇴 이후 부산의 실제 인구는 200만 명이나 됐다. 당시 피난민들이 지은 산비탈의 집들은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할 만큼 상징성이 크다. 당시 가족과 헤어진 사람들, 또 다른 금순이가 1000만이다.

1950년 12월 23일, 흥남부두의 날씨는 영하 20도였고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러한 악기상 속에 출발한 미군철수용 선박은 2박3일을 항해해 12월 25일 경남 거제 장승포항에 도착했다. 이때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7600t)는 정원이 2000명이었는데 레너드 라루 선장의 결단으로 1만4000명이 타고 항해했으며, 항해 중에 신생아 5명이 탄생한다. 미군들은 이들에게 김치1~김치5의 별명을 붙여줬다. 그 김치5가 실제 인물 이경필 씨이며, 거제도에서 평화동물병원을 경영하면서 평생을 살았다. 이분이 흥남철수가 낳은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의 산증인이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철수작전에 동원된 선박 193척 중의 한 척이다. 라루 선장은 종전 후에 천주교 사제(司祭)가 되었으며 이름도 매리너스로 바꿨다. 철수 당시 작전지휘관은 미10군단장 아몬드 소장, 한국군 1군단장 김백일 소장이었다. 이 둘 사이를 이어준 군사협력 통역고문관이 현봉학이었다. 그는 버지니아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는데 아몬드 소장의 고향이 버지니아였다. 고향이 얽힌 인연, 이러한 관계가 탑승을 완료하고 출항을 기다리던 미군 병력과 장비를 하선(下船)시키고 한국 피난민을 탑승시킨 배경이다. 이 내용은 영화 ‘국제시장’에서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다.

1950년 12월 23일 메러디스 빅토리아호가 흥남부두를 떠난 다음 날, 흥남부두는 화염에 휩싸였다. 미처 철수시키지 못한 장비와 물자를 공산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청야작전(淸野作戰)을 한 것이다. 청야작전은 주변에서 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는 전술이다. 견벽청야(堅壁淸野)라고도 한다. 방어작전을 하는 측이 자발적으로 사용하는 초토화 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수의 1차 침입),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에서 활용했다. 세계적으로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나 독소전쟁에서 소련이 활용하기도 했다.

<굳세어라 금순아>를 부른 가수 현인의 본명은 현동주다. 현인이 1953년 35세에 부른 이 노래는 박시춘이 작곡하고 현인의 친구 강사랑이 작사했다. 노랫말에는 흥남부두,1·4후퇴,국제시장,영도다리 등 시대를 상징하는 지명과 상황이 들어 있다.

가족과 생이별하고 피난지에서 장사를 하며 살아가는 주인공의 한탄과 그리움이 짙게 배어나는 이 노래의 배경은 부산이지만 노래를 만든 박시춘과 강사랑은 대구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 노랫말 속의 금순이는 실제 인물이다. 영도다리에 보름달이 뜨면 만나기로 한 약속은 보름달이 초승달이 될 때까지 밤마다 나가서 기다리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이 사연이 2절 끝에 나온다. 


유 차 영 
한국콜마홀딩스 전무 
예비역 육군대령
유 차 영 한국콜마홀딩스 전무 예비역 육군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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