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건축, 전쟁사를 말하다

700년 英 내전의 주 무대 군사 박물관으로 재탄생

입력 2020. 05. 29   17:05
업데이트 2020. 05. 29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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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영국의 칼라일 성


1092년 잉글랜드 윌리엄 2세 때
스코틀랜드 방어 목적으로 건설
수차례 포위 공격…城主 뒤바뀌어
1603년 왕 통합 전까지 전쟁 계속
영국史 마지막으로 포위 겪은 요새 

 

칼라일 성 전경.
사진=great-castles.com
칼라일 성 전경. 사진=great-castles.com
1400년경 칼라일 성의 모습을 상상해 그린 삽화. 사진=잉글리시 헤리티지 홈페이지
1400년경 칼라일 성의 모습을 상상해 그린 삽화. 사진=잉글리시 헤리티지 홈페이지
작가 미상의 윌리엄 2세의 초상화. 
 사진=www.bl.uk
작가 미상의 윌리엄 2세의 초상화. 사진=www.bl.uk

영국 잉글랜드 서북쪽에 위치한 컴브리아 주(州)의 칼라일 시(市)는 스코틀랜드 국경에서 16㎞ 떨어져 있는 곳으로 예부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칼라일 성(Carlisle Castle)은 1092년 윌리엄 2세가 스코틀랜드로부터 잉글랜드를 방어하기 위해 옛 로마의 요새 자리에 노르만 양식으로 건설했다. 그 후 이 성은 수차례 포위 공격을 당했으며, 성의 주인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로 뒤바뀌었다. 이곳이 마지막으로 전쟁사에 기록된 것은 1746년 자코바이트의 난을 진압하기 위한 성채 포위 공격이다. 성은 삼각형 모양으로 회색과 붉은색 사암으로 지어졌는데, 약 4900평(1.6헥타르) 규모이다.


옛 로마 요새 자리 건축…몇 세기간 개축


칼라일은 73년경 로마 제국이 스코틀랜드와 대치할 요새로 조성한 도시이다. 정복왕 윌리엄 1세의 아들인 윌리엄 2세(1056~1100)는 1092년 칼라일을 함락해 도시를 재건하고 성을 세우도록 명령해 칼라일 성이 옛 로마 요새 자리에 흙과 목재로 건축됐다.

요새로서 칼라일 성의 역할은 윌리엄 2세의 뒤를 이은 동생 헨리 1세(1068~1135) 때부터 시작됐다. 헨리 1세가 1122년 칼라일을 방문해 “성곽과 탑으로 강화하라”고 명령하면서 성은 석재로 1130년대까지 개축됐다. 이때 하드리아누스 방벽(영국 잉글랜드의 컴브리아 주·노섬벌랜드 주·타인위어 주에 걸쳐 있는 약 120㎞ 길이의 로마 제국의 성벽)의 돌을 떼어다 지어졌다.

헨리 1세가 세상을 떠난 1135년 칼라일 성은 스코틀랜드의 왕 데이비드 1세(1084~1153)로 주인이 바뀌게 된다. 데이비드 1세는 헨리 1세에 이어 성의 개축을 이어나가며 성채를 강화했다. 데이비드 1세 사후 다시 잉글랜드 왕으로 성의 통치자가 변경됐다. 몇 세기를 거치며 성은 더욱 강화됐다.


스코틀랜드에 의해 7차례나 포위당해

칼라일 성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국경 지대에 있었기에 1603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한 명의 왕으로 통합되기 전까지 전쟁은 계속됐다.

스코틀랜드인들은 1173년에서 1461년 사이에 일곱 차례나 성을 포위했다. 이 중 가장 격렬했던 포위는 1315년 스코틀랜드 왕 로버트 1세(1274~1329)가 배넉번 전투(1314)에서 잉글랜드를 상대로 승리한 이후 펼쳐진 공격이었다. 로버트 1세는 군대를 직접 주도한 전면 공격을 펼쳤지만 잉글랜드의 끈질긴 방어로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결국 퇴각했다.


장미전쟁·잉글랜드 내전 등 펼쳐져

이 성은 영국 내전의 주요 전장으로 수차례 역사의 주 무대로 올라선다. 이 중 1461년 포위전은 장미 전쟁(1455~1485) 중 가장 피비린내 나는 일화 중의 하나로 기록돼 있다.

이 전쟁은 붉은 장미를 문장(紋章·왕이나 귀족 집안의 상징인 그림)으로 쓰는 랭커스터 가문과 흰 장미를 문장으로 삼은 요크 가문이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30년 동안 벌인 내전이다. 랭커스터 가문은 스코틀랜드군과 연합해 요크 가문으로부터 성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찰스 1세(1600~1649)가 통치하는 동안 종교정책에 대한 스코틀랜드의 극심한 반대로 인해 칼라일 성은 다시 전장이 됐다. 잉글랜드 내전(1642~1651)은 찰스 1세를 지지하는 왕당파와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 간의 전쟁이었다. 왕실주의자들이 수비한 칼라일 성은 1644년 7월 마스턴 무어 전투에서 찰스 1세의 북부군이 패배한 후 왕을 위해 버티던 북쪽의 몇 안 되는 장소였다.

그해 10월 성은 찰스 1세에 반대하던 의회파와 연합한 스코틀랜드군에 의해 8개월 동안 포위당했다. 성안에서 굶주리던 왕당파들은 성 내의 모든 동물을 잡아먹으며 버텼지만, 1645년 6월 14일 네이즈비 전투에서 나머지 왕당파들이 패배한 후, 6월 25일 항복했다.


1746년 칼라일 성의 마지막 포위 공격


칼라일 성은 추방된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2세와 그 직계를 왕좌에 복귀시키려 했던 자코바이트(영국 명예혁명 이후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스튜어트 왕조의 복위를 주장하던 정치세력)의 난 때 마지막 포위 공격을 당한다.

1745년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1720~1788) 왕자는 자코바이트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진군했지만, 차츰 군의 지지를 잃어갔다. 이에 국경을 넘어 스코틀랜드로 후퇴해 칼라일 성을 점령했다.

다음 해인 1746년 영국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벌어진 성채 포위 공격이 일어났는데, 자코바이트 군이 주둔하던 칼라일 성은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오거스터스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에게 함락당했다.

1746년 4월 16일 컬로든 전투에서 자코바이트가 패배함으로써 반란은 완전히 마무리됐다. 1746년 이후 성은 중요성은 점차 약화됐다. 프랑스 전쟁 포로들이 이곳에 억류됐으며, 1783년 도개교 등 건축물에서 약간의 수리가 이뤄졌다.

이 성은 19세기 초에 정치 개혁을 추구하는 운동가들에 의한 혁명에 대비하기 위해 군대를 위한 막사로 개조됐다. 군대는 20세기까지 성곽 건물을 계속 확장하고 발전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 때 기지로 쓰이기도 했다. 이후 1962년까지 왕립 연대의 본부로서 막사와 중요한 수비대를 수용했다.

오늘날 이 성은 대부분의 군사 기능들이 사라졌지만, 성안에는 군사박물관이 있다. 7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장의 주 무대였던 칼라일 성은 전쟁이 사라진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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