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건축, 전쟁사를 말하다

조선 침략자가 쌓은 성… 이곳에서 임진왜란은 시작됐다

입력 2020. 05. 15   17:04
업데이트 2020. 05. 17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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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일본의 오사카 성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거주 성
축성 후 1592년에 조선 침략
잇단 전쟁에 파괴됐다가 재건
일제 육군4사단 사령부로 쓰여
‘일본 4대 城’ 관광지로 활용 

 

오사카 성 전경. 사진=픽사베이.
오사카 성 전경. 사진=픽사베이.

오사카 성은 구마모토 성, 히메지 성, 나고야 성과 더불어 일본의 4대 성(城)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곳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을 달성한 후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1583년 축성을 시작했으며, 성이 완공된 후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19세기 말 메이지 유신 때 벌어진 보신전쟁 중 성에 화재가 발생해 성의 대부분이 전소됐다가 1930년대 재건됐지만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군사시설이 있던 오사카를 파괴하려는 미군의 공습으로 성의 천수각(天守閣·일본의 전통적인 성 건축물에서 가장 크고 높은 누각)을 제외한 거의 모든 건물이 파괴됐다. 전쟁이 끝나고 복원된 후 1997년 일본 국가등록문화재에 지정됐다. 오사카 성의 상징인 천수각은 5층 건물 위에 3단의 망루를 올려서 쌓아 만든 5층 8단의 구조로 돼 있으며 총 높이는 55m이다.

16세기 도요토미 히데요시 명으로 지어져

일본 통일에 나선 오다 노부나가(1534~1582) 사후 정권을 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는 1583년 당시 일본 수도인 교토 외곽의 상업도시 오사카가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로서 이점을 지니고 있음을 간파하고 거대한 성을 축성한다. 1585년 오사카 성의 4층 규모 천수각이 완성됐다. 히데요시는 말년에 얻은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1593~1615)를 적대 세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오사카 성을 네 차례에 걸쳐 확장했다. 이곳은 요도 강을 끌어들여 만든 이중으로 된 해자(垓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와 성곽을 갖춰 일본 제일의 난공불락 요새로 여겨졌다.

하지만 평민에서 일본 통일을 이룩한 도요토미 가문의 명운은 길지 못했다. 1592년 히데요시는 지방 다이묘(일본 헤이안 시대 말기에서 중세에 걸쳐 많은 영지를 가졌던 봉건 영주)들의 불만을 달래고자 조선을 침략하는 전쟁을 오사카 성에서 계획하면서, 임진왜란(1592~1598)이 발발했다. 히데요시가 병과 노환으로 정유재란(1597~1598) 중에 병사하자, 일본군은 조선에서 퇴각했다.

1614~1615년 오사카 전투 후 모두 파괴

히데요시가 죽고 나자 조선 침략에 가담하지 않아 세력을 유지한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에게 힘의 중심이 이동했다. 1600년 10월 21일 일본 혼슈에서 전국의 다이묘들이 패권을 놓고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세키가하라 전투를 벌였다. 이에야스는 자신이 이끄는 동군이 승리하면서 1603년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의 지위에 올라 에도 막부 정권을 세웠다. 도요토미 가문은 다이묘 가운데 하나로 지위가 몰락했지만, 이에야스에게는 큰 눈엣가시로 남았다.

히데요시의 가신이었던 다이묘들이 도요토미 가문에 충성하고 있었고, 히데요리는 오사카 성을 기반으로 점차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614년 겨울 이에야스는 히데요리가 도쿠가와 막부에 맞서서 역모를 꾸몄다고 주장하고, 이를 벌한다며 2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오사카 성을 공격하면서 오사카 겨울 전투가 벌어졌다.


이에 맞서는 도요토미 진영은 10만 명에 이르렀다. 오사카 성의 두터운 성벽과 한겨울 추위, 군량 부족으로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진영과 화의(和議)를 추진했다.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의 영지를 인정하고 책임을 묻지 않는 대신 오사카 성의 본성을 제외한 바깥의 성곽들을 모두 파괴하고 해자도 모두 매립한다는 조건으로 합의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약속을 어기고 7만 명을 동원해 오사카 성을 둘러싼 본성의 해자까지 모두 매립하고 성곽도 무너뜨렸다. 이에 도요토미 측은 다시 성벽을 쌓고 해자를 파내는 대공사를 시작했다. 이에야스는 이를 빌미 삼아 1615년 5월 오사카 여름 전투를 벌였다. 이때 병력은 도쿠가와 측이 약 15만 명, 도요토미 측이 약 5만5000명 정도였다. 외성이 사라진 오사카 성은 전투가 시작되고 단 2일 만에 이에야스에게 함락됐으며 히데요리는 어머니 요도기미와 함께 자결했다. 승리한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을 멸문한 데 이어 오사카 성까지 완전히 파괴했다.

1869년 오사카 성 내 육군소 창설

도쿠가와 시대는 막을 내렸고, 메이지 유신이 이뤄지면서 성터는 국유지가 됐다. 메이지 정부는 성내의 부지를 육군의 부지로 활용하고, 민간인의 출입을 금했다. 일본 육군의 창설자인 오무라 마스지로가 오사카 성 일대를 일본 육군의 중심지로 전환할 계획을 수립하면서 1869년 7월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병학료(兵學寮) 청년학사와 육군성의 전신인 육군소가 오사카 성 내에 창설됐다. 성 외곽 지역에는 1879년 포병창을 비롯해 여러 공장이 들어섰다. 1888년부터 오사카 성은 육군 제4사단 사령부와 주둔지로 사용됐다. 이후 오사카 시의회가 천수각 재건에 관한 세키 하지메 오사카 시장의 제안을 만장일치로 가결시키며 오사카 성의 재건이 1930년대 시작됐다.

천수각은 철근 콘크리트로 1931년 완성됐다. 오사카에 있는 병기 공장과 군사 시설로 인해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오사카는 미군의 8차례 대규모 공습을 포함해 총 50차례가 넘는 공습으로 시가지 대부분이 피해를 입었다. 오사카 성도 성문이나 망루 등 다수의 건물이 파괴됐지만 천수각은 별다른 공습의 피해 없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전후 1995년부터 1997년까지 대대적인 복원과 보수 공사가 진행됐다.

지난해 6월 G20 정상회의가 일본 오사카에서 열렸는데, 각국 정상 전원이 오사카 성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을 정도로 오늘날 오사카 성은 유명 관광지가 됐다. 하지만 이 성을 찾는 한국인만큼은 임진왜란이 이곳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알고 방문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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