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건축, 전쟁사를 말하다

스페인 대표작 한눈에…내전으로 미술품 피난 수난도

입력 2020. 04. 17   17:28
업데이트 2020. 05. 04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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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프라도 미술관


고야 등 스페인 대표 화가 작품 다수
회화 7600점 등 방대한 미술품 보유
‘세계 3대 미술관’ 개관 200주년 맞아

 
나폴레옹 침략·스페인 독립 전쟁으로
1785년 착공했으나 1819년 개관
1936년 스페인 내전에 미술품 피난
2차 대전 시작과 함께 작품 되돌아와

프라도 미술관 전경. 사진=www.captourist.com.
프라도 미술관 전경. 사진=www.captourist.com.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있는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은 미국의 뉴욕 현대미술관,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함께 세계 3대 미술관으로 손꼽힌다. 이곳은 12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럽의 회화 7600점, 8200여 점의 소묘, 1000여 점의 조각 등 방대한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다. 특히 벨라스케스, 고야, 엘 그레코 등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들의 그림이 다수 소장돼 있다.

프라도 미술관은 1785년 카를로스 3세에 의해 건설됐다가 1808년 나폴레옹과의 전쟁으로 인해 공사가 중단됐다. 스페인 독립 전쟁(1808~1814)을 마치고 공사를 재개해 1819년 개관했다. 스페인 내전(1936~1939) 동안 이곳의 주요 소장품들은 스위스의 제네바로 대피했다가 내전이 끝난 뒤 되돌아왔다. 스페인 내전 중 벌어진 게르니카 지역 폭격을 그린 피카소의 유명 작품 ‘게르니카’(Guernica)는 프랑코 정권의 독재가 끝난 뒤인 1981년 이곳에 소장됐다가 1992년 왕립 소피아 미술관으로 옮겨갔다.  


자연사박물관으로 지어졌으나, 나폴레옹과의 전쟁으로 중단

1785년 카를로스 3세(1716~1788)는 자연사박물관을 만들 목적으로 건축가 후안 데 빌라누에바로 하여금 프라도 미술관 자리에 건물을 짓게 했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1789~1794) 이후 나폴레옹이 군대를 이끌고 1808년 스페인을 침략한 후 공사는 중단됐다.

마드리드를 점령한 나폴레옹은 당시 스페인의 왕이었던 페르난도 7세(1784~1833) 대신,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1768~1844)를 스페인 왕위에 앉혔다. 이에 분노한 스페인의 시민들은 1808년 5월 2일 프랑스 군대에 대항해 폭동을 일으켰다. 하지만 프랑스군에 의해 무참히 진압된 후, 다음 날인 5월 3일 밤 폭동에 가담했던 44명의 시민들은 프린시페 피오 언덕에서 조아킴 뮈라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에 의해 모두 처형당했다. 스페인의 화가 고야(1746~1828)는 이 과정을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라는 작품으로 그렸다.

프라도 미술관 2층 64번 전시실에 있는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5월 3일’ 작품. 프랑스군에 대항해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민중 봉기에 가담했던 시민들이 처형되는 장면을 그린 역사화이다.   사진=프라도 미술관
프라도 미술관 2층 64번 전시실에 있는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5월 3일’ 작품. 프랑스군에 대항해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민중 봉기에 가담했던 시민들이 처형되는 장면을 그린 역사화이다. 사진=프라도 미술관


스페인 왕가의 미술관으로 1819년 개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프랑스의 지배에 대항해 스페인 독립 전쟁을 일으켜 조제프를 몰아내고 독립했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미완성으로 남아 있던 프라도 미술관은 페르난도 7세에 의해 신고전주의 양식 건물인 빌라누에바 궁으로 1819년 11월 19일 개관했다. 스페인 왕실의 소장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활용돼 궁 내 40개 방이 전시실 기능을 했다. 전시품은 311점의 스페인 회화를 포함한 1510점이 넘는 작품들로 구성됐다. 이사벨라 2세(1830~1904) 여왕 재위 말기인 1868년 9월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고 제1공화국이 세워지면서 프라도 미술관은 국유화됐으며, 스페인어로 ‘초원’, ‘목초지’라는 뜻의 프라도(Prado)로 새로운 이름이 지어졌다.

스페인 내전으로 미술관 폭격 피해

프라도 미술관은 20세기에 이르러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감긴다. 1936년 2월 진행된 총선거에서 인민전선 정부가 제2공화국으로 집권했다. 하지만 이를 반대하는 프란시스코 프랑코(1892~1975) 장군의 파시스트 세력이 1936년 7월 17일 반란을 일으켜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소련은 정부군을 지원했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침묵했다. 반면,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프랑코 장군을 지지했다.

내전 초인 1936년 11월 16일 프랑코 군의 비행기가 떨어트린 9개의 소이탄이 프라도 미술관을 강타했다. 이에 미술관 직원들은 작품들을 폭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1층에 모아놓고 모래주머니로 뒤덮었다. 국제연맹(제1차 세계대전 이후인 1920년 미국 윌슨 대통령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국제평화기구)의 권고에 따라 미술관은 364점의 그림, 180점의 소묘, 왕실의 보물 등을 발렌시아로 보냈다. 이 중에는 고야의 작품 115점, 엘 그레코의 작품 43점, 벨라스케스의 작품 45점 등도 포함돼 있었다. 나중에 스페인의 지로나로 옮겨졌다가 마지막에는 국제연맹이 있는 스위스의 제네바로 이송됐다.

1939년 3월 프랑코 장군이 마드리드를 함락하면서 그해 4월 1일 전쟁은 종료됐다. 모든 작품들은 제2차 세계대전 시작과 함께 야간열차에 실려 프랑스 영토를 가로질러 미술관으로 되돌아왔다. 스페인은 2차 대전에 참전하진 않았지만, 프랑코 정권은 은밀히 독일, 이탈리아 등의 추축국에 협조했다.

스페인 내전 동안 미술관에 있는 작품들은 1층에서 모래주머니로 덮여 폭격으로부터 보호됐다. 
 사진=www.theartnewspaper.com
스페인 내전 동안 미술관에 있는 작품들은 1층에서 모래주머니로 덮여 폭격으로부터 보호됐다. 사진=www.theartnewspaper.com


피카소의 ‘게르니카’ 작품,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됐다가 1992년 이관

잘 알려져 있듯이 스페인 내전 중인 1937년 나치의 게르니카 폭격 소식을 접한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고국의 참상을 널리 전하기 위해 그해 6월 프랑스 파리 만국박람회에 내걸 작품으로 ‘게르니카’를 그렸다. 1936년 9월 인민전선 정부로부터 프라도 미술관의 명예 관장으로 임명되기도 한 피카소는 스페인 내전이 끝나고 프랑코 독재에 대한 항거의 뜻으로 ‘게르니카’를 고국으로 보내지 않았다. 이후 ‘게르니카’는 스페인의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프라도에 전시한다는 조건으로 1939년 미국으로 보내진 뒤 이듬해부터 뉴욕 현대미술관에 소장됐다.

스페인은 프랑코가 사망한 1975년까지 36년간 군부 독재하에 있었다. 프랑코 사후 스페인이 새 헌법에 의한 민주주의 국가로 변모하자, ‘게르니카’는 40년이 넘는 타향살이의 종지부를 찍고 드디어 1981년 9월 9일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됐다. 하지만 ‘20세기 이후의 작품은 소장하지 않는다’는 프라도 미술관의 원칙에 따라, ‘게르니카’를 비롯한 20세기 이후 작품은 1992년 왕립 소피아 미술관으로 이관됐다.

프라도 미술관은 3개의 층으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1층에는 화가들의 이름을 딴 3개의 문이 있는데, 중앙에 벨라스케스 문, 건물 양쪽 끝에 고야 문과 무리요 문이 있다. 2000년대 들어 소장품이 늘면서 전시 공간이 부족해지자 2007년 라파엘 모네오의 설계로 5만1425평(17만㎡) 규모의 붉은 벽돌로 된 신관을 증축했다. 지난 2019년 개관 200주년을 맞은 프라도 미술관은 매년 280만 명이 찾는다. 관람객들은 특히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을 감상하면서 전쟁과 평화의 의미를 되새김한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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