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한국전쟁 70주년, 대중가요로 본 6.25전쟁

<5> 가거라 38선- 작사 이부풍, 작곡 박시춘, 노래 남인수

입력 2020. 03. 27   16:33
업데이트 2020. 03. 30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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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울려 퍼진 ‘망향의 곡성’
원래 가사였던 ‘삼팔선을 헤맨다’
‘삼팔선을 탄한다’로 1948년 개사
38선에 고향길 막힌 시대 아픔 담아



<가거라 38선>은 제2차 세계대전의 끝자락에 매달린 서글픈 절창이다. 소위 일본제국주의자들이 꿈꾸던 망몽(亡夢), 대동아전쟁(국제정치학적으로 태평양전쟁)에서 항복한 후 한반도에 울려 퍼진 망향의 곡성(哭聲)이다.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35년간의 일제식민지에서 광복을 맞이하지만, 미국과 소련이 주도한 정치적 분계선 38선에 남북으로 오가는 고향길이 막혀버린다. 이 환희와 비탄의 갈림길, 다 같은 고향 땅을 오고 가지 못하던 시대적인 비련을 이부풍이 가사로 얽고 박시춘이 곡을 지어서 남인수가 불렀다. 이때 노랫말이 당국의 검열에 걸린다. 이부풍은 당국의 개사 요구에 불응하며 잠적해 버렸다. 그래서 진방남(반야월)의 손끝에서 일부 개사가 된다. 1948년 11월 20일, 자유당 정권에 의해서 ‘삼팔선을 헤맨다~’를 ‘삼팔선을 탄한다~’로.
  
한반도의 허리에 38선이 그어진 배경은 이렇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15분, 히로시마에 투하한 우라늄원자폭탄(리틀보이)과 8월 9일 오전 11시02분, 후쿠오카 나가사키에 플루토늄원자폭탄(패트맨)이 투하된다. 이에 일본은 두 손을 든 항복을 하고 전쟁 상황은 종결됐다. 무조건 항복의 결정적인 계기는 두 번째 원자폭탄 투하. 이때 미군은 사이판 섬 남단 5~6㎞ 지점에 있는 티니언 섬에 12발의 원자폭탄을 추가로 배치해 둔 상태였다.


이 절묘한 타이밍에 그동안 제2차 세계대전을 관망만 하던 소련은 8월 9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8월의 폭풍작전’ 명칭하에 한반도에 주둔하던 일본군을 침공한다. 육군이 8월 9일 두만강을 넘고, 13일 극동함대를 청진항에 상륙시켜 청진방송국을 장악한다. 이때 방송국 직원과 일본군은 현장에서 폭사하고 구사일생의 방송국장 부인이 함흥방송국으로 피신하여 상황을 알린다. 깜짝 놀란 미국은 한반도 중간지점인 38도선에 굵은 선을 긋고, 이남은 미국이 이북은 소련이 점령하기로 제안하고 소련이 수용한다.

미국의 ‘일반명령 1호’와 소련의 ‘8월의 폭풍작전’이 정치적으로 만난 접점. 일본군 무장해제를 목적으로 국토의 허리를 횡단한 선이 38도선이다. 그로부터 소련군과 미군이 남북한에 주둔한다. 이후 1948년 8월 15일 남한은 합법단독정부가 수립되며, 북한에는 같은 해 9월 9일 소련의 사주를 받은 공산정권이 수립된다. 이후 남북한 국민은 고향을 오고 가지 못한다. 이 38선이 바로 노래의 모티브다. 이 노래는 광복 후 음반 1호로 알려졌었지만, 사실은 KPK악단 반주로 출반한 <흘러온 남매>가 1호라고 한다.


이 38선을 중심으로 한 소련과 미국의 한반도 분할 점령안은 1945년 8월 14일 미국과 소련의 합의로 결정됐다. 그 이전인 1945년 7월 미국 국방부는 연합국(미국·소련·영국·프랑스)이 분할해 한반도를 점령할 계획을 수립했었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시 독일 분할점령과 유사하다. 이러한 독일 분할점령이 동서독을 분리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로부터 45년 뒤인 1990년 10월 3일,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냉전체제 아래서 연합국에 의해 강제로 분단됐던 독일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된다.

이 노래 1절과 2절 사이의 중간대사는 더욱 절절하다.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 다 같은 조국 땅을 가고 오련만/ 남북이 가로막혀 원한 30년/ 어쩌다 북녘 땅이 핏빛으로 물들어/ 편지 한 장 전하지도 못한단 말인가!/ 38선아 가거라/ 아~ 가거라 38선아~’이런 중간 대사들은 6·25전쟁 후 세월을 더해 가면서 대중가요에 애드리브를 더해 가는 망향의 감흥이다.

당시 30세, 본명 강문수, 아명 최창수, 예명 남인수는 1918년 진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설이 많았다. 하지만 이러한 설들은 2013년 남인수 생가와 관련한 검정 결과, 남인수는 아버지 강영태가 아들을 보기 위하여 마을 어귀 주막 주모 장하방과의 사이에서 태어났음이 공식화됐다. 그동안 남인수 생가로 알려져 온 집도 남인수가 기거한 집으로 확인됐다. 그는 여자가 많아서 여인수, 돈이 많아서 돈인수로도 불렸다.

그는 1935년 서울로 올라와 시에론레코드사에서 <애수의 소야곡>의 원곡인 <눈물의 해협>을 취입하여 가수로 데뷔했고, 1936년 오케레코드사에 입사하여 남인수로 예명을 바꾸어 전속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1936년 이난영이 김해송과 결혼한 후 3년 뒤, 남인수는 1939년 김은하와 결혼해 2남2녀를 두었다. 1958년 말께 김은하와 이혼하고, 6·25전쟁 때 남편 김해송이 월북해 혼자 남은, 첫사랑 이난영과 다시 만난다.


■필자

유차영

한국콜마홀딩스 전무

예비역 육군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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