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건축, 전쟁사를 말하다

에펠탑, 유럽 대표 건축물… 1차 대전 때도 나라 지켰다

입력 2020. 03. 27   15:53
업데이트 2020. 03. 29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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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프랑스의 에펠탑


에펠탑 무선송신기 활용 독일군 통신 방해
파리 함락 일보 직전 위기에서 벗어나
해체·폭파 고비 넘기고 세계 명소 자리매김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 전경.  사진=픽사베이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 전경. 사진=픽사베이


파리 센강 서쪽 마르스 광장에 있는 에펠탑은 프랑스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프랑스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에서 독일에 당한 치욕을 만회하고 국력을 과시하고자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 기념 파리 만국박람회를 앞두고 세웠다. 건립 당시 탑의 높이는 300m로 1930년 뉴욕에 크라이슬러 빌딩이 완공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프랑스를 침공해 1940년 6월부터 파리를 점령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연합군이 파리로 진격해오자 히틀러는 파리 주둔 독일군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1894~1966)에게 에펠탑을 비롯한 파리의 주요 건축물을 폭파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콜티츠가 명령에 불복종하면서 에펠탑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프랑스 혁명 100주년 맞아 

파리 만국박람회 전시물로 지어져

프랑스 혁명(1789~1794)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후유증으로 내리막길을 걷던 프랑스는 경쟁 국가였던 영국이 세계 최초의 만국박람회(1851)를 성공적으로 치른 것을 모티브 삼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맞는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열어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했다. 전시물 설계 공모를 진행해 모인 수백여 개의 응모작 가운데 구스타브 에펠(1832~1923)이 제안한 뒤집어 놓은 Y자 형태의 거대한 철탑이 선정됐다. 하지만 소설가 기 드 모파상, 에밀 졸라, 알렉상드르 뒤마, 작곡가 샤를 구노 등 파리 예술가들은 ‘파리의 수치’ ‘철사다리로 만든 깡마른 피라미드’라며 파리의 중심부에 거대한 철탑을 세운다는 것에 큰 불만을 가졌다. 시민들도 격렬하게 반대했다.


철골 부재 7300톤 쓰여… 높이 300m 건축물

에펠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에펠탑은 1887년 1월 28일 착공해 1889년 3월 31일 대역사가 마무리됐다. 철을 주재료로 한 에펠탑은 높이 300m로 철의 시대 개막을 알렸다. 탑에 쓰인 철골 부재의 무게는 7300톤에 달했으며, 1만8038개의 부재를 잇기 위해 250만 개의 리벳(대가리가 둥글고 두툼한 버섯 모양의 굵은 못)이 사용됐다. 부대시설을 포함한 전체 무게는 1만100톤으로 완공됐다. 승강기를 설치해 총 3개 층으로 이뤄진 탑의 최고층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했다. 탑은 만국박람회가 개최되자 200만 명이 찾으며 엄청난 흥행을 거뒀다.


제1차 세계대전 때 1차 마른전투 승리 기여

에펠탑은 완공된 지 20년이 되는 1909년, 소유권이 파리시에 넘겨진 뒤 당초 공모의 조건에 따라 해체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탑에 매료된 시민들이 해체 반대운동을 벌인 데다 철거에 드는 비용이 막대하며 이 무렵 발명된 무선 전신 전화의 안테나로 탑을 이용할 수 있다고 알려지면서 해체 위기를 넘겼다.

에펠탑이 전쟁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면서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다. 전쟁이 터진 뒤 불과 38일 만에 독일군이 슐리펜 계획에 따라 프랑스에 진격하면서 파리가 함락 일보 직전까지 놓이자 프랑스 정부는 보르도로 피신했다. 프랑스 군부는 에펠탑에 있는 무선송신기를 활용해 1914년 9월 6일부터 10일까지 파리 외곽에서 벌어진 1차 마른전투 초반 독일군의 무선 통신을 방해하면서 승리에 기여했다. 1차 마른전투 후 프랑스는 수도를 잃을 큰 위기에서 벗어났고 전쟁의 조기 종결을 꿈꾼 독일의 희망은 무산됐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에 의해 폭파 위기, 

콜티츠의 명령 불복종으로 넘겨

에펠탑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또다시 위기를 맞는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프랑스가 마지노선을 쌓고 만전을 기했지만 독일은 1940년 5월, 개전 6주 만에 파리를 함락했다. 1940년 6월 22일 히틀러는 프랑스와 휴전협정을 맺은 후 파리를 방문해 파리 오페라 하우스, 에투알 개선문, 앵발리드 그리고 에펠탑을 둘러봤다. 히틀러는 에펠탑 꼭대기에 올라가고 싶어 했지만 승강기 케이블이 프랑스군에 의해 끊겨 계단으로 올라가야 했기에 포기했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프랑스에 상륙하며 독일군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해 8월 연합군이 파리에 접근하자 히틀러는 파리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군 사령관 콜티츠 장군에게 에펠탑을 비롯해 루브르 박물관, 노트르담 대성당, 콩코르드 광장 등 파리의 주요 건물을 폭파하고 파리 시가를 불태우라고 지시했다. 콜티츠는 “나는 히틀러의 배신자가 될지언정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어 인류의 죄인이 될 수는 없다”며 명령을 거부했다. 히틀러가 콜티츠에게 9번이나 전화해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라고 물었을 때 그는 “그렇다”라고 허위보고를 했다. 콜티츠의 명령 불복종으로 에펠탑은 파괴되지 않았다. 이 과정은 1966년 르네 클레망 감독의 영화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로 만들어졌다.


현재 세계 각지의 테러 희생자 추모 역할

1957년 탑 꼭대기에 텔레비전 안테나가 설치돼 높이가 324m로 경신됐다. 1999년 12월 31일 파리의 새천년 기념식이 이곳에서 열렸는데 탑 꼭대기에 탐조등이 설치됐으며 2만 개의 전구가 탑 전체에 장식됐다. 이로써 탑은 매일 정해진 시간 동안 파리의 밤하늘을 빛낸다.


이 탑은 현재 세계 각지에서 테러가 일어날 때마다 소등하면서 희생자들을 추모한다. 지난 2015년 1월 샤를리 에브도 테러 희생자 추모를 비롯해 2017년 5월 영국 아리아나 그란데 콘서트 폭발사고, 2019년 4월 스리랑카 희생자 추모를 위해 탑은 화려한 불빛을 끄고 어둠 속에 잠겼다. 에펠탑은 프랑스의 굳건한 자존심으로서 오늘도 새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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