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완결 한주를열며

고난 뒤에 얻을 경험과 지혜

입력 2020. 03. 29   14:18
업데이트 2020. 03. 29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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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원 

월간 ‘샘터’ 편집장

조반니 보카치오(1313~1375)의 역작 『데카메론』은 14세기 중반 유럽을 휩쓴 ‘페스트(흑사병)’를 피해 피렌체 교외 별장에 모여든 열 명의 남녀가 10일 동안 인간의 본능과 허영에 관해 나눈 100편의 얘기를 기록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과 과감한 해석으로 근대 소설의 시초라고 불리는 이 작품이 발표되기 몇 년 전, 유럽은 단 3년 만에 전체 인구의 3분의 1인 2500만여 명을 미증유의 전염병으로 잃은 뒤였다.

페스트가 휩쓸고 간 유럽은 과연 급격히 황폐해졌다. 전염병으로 땅을 경작할 노동인구가 부족해진 탓에 봉건지주들의 파산이 이어졌고, 신의 구원을 약속하던 종교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갑자기 줄어든 성직자 수를 보충하려고 성직 희망자의 자격조건이 대폭 완화됐다. 역사에는 “이전에는 성직에 들어올 수 없던 인물들이 대거 등용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페스트의 공포는 필연적으로 사람들의 의식구조나 생활양식에도 변화를 불러왔다. 새롭게 나타난 개인주의와 상업의 발달은 도시 중심의 근대적 생활양식이 확립되는 단초가 됐고, 신앙의 균열이 커지는 틈으로 미신과 이단이 크게 유행했다. 인간의 창의력에서 발현하는 문화예술의 퇴보도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아비규환의 환란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예술가들은 목전에서 경험한 죽음의 공포를 기록하는 데 급급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보카치오는 이런 상황에서도 생명의 원천인 ‘에로스(Eros)’를 통해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말하고 있다. 우리에겐 남녀상열지사나 문란한 성의 기록쯤으로 오해받는 부분이 있지만, 이 소설이 단테의 『신곡』에 빗대 ‘인곡(人曲)’으로까지 상찬되며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걸작으로 평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흉흉한 소문들이 들불처럼 전 세계로 번지더니 세계보건기구(WHO)가 급기야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대유행)을 선언했다. 다행히 우리는 정부의 선제적 대응과 국민의 협조 덕분에 실낱같은 희망의 실마리를 이어가고 있지만, 보도에 따르면 지구촌 인구의 5분의 1이 집에 머물도록 명령 또는 권고를 받는 중이다. 전 세계가 앞다퉈 한국의 방역시스템과 진단키트를 요청해오는 건 그만큼 작금의 상황을 심상치 않게 보고 있다는 방증이다.

코로나19와의 보이지 않는 사투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이 환란의 시간이 언제 끝날지 누구도 단언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 위기를 잘 견디고 나고 나면 우리에겐 모든 국민이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 전 지구적 역병을 이겨낸 또 한 번의 귀한 경험과 지혜가 쌓이게 될 것이다. 출구 없는 미로는 없고, 끝나지 않을 고통은 없다. 이 혼란을 직접 목격한 우리 각자는 훗날 어떤 ‘데카메론’(그리스어로 ‘10일간의 이야기’라는 뜻)을 남기게 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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