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한국전쟁 70주년, 대중가요로 본 6.25전쟁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 노래, 6·25전쟁 중 탄생

입력 2020. 03. 06   16:30
업데이트 2020. 03. 16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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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우야 잘 자라’ -유호·박시춘·현인


작사가 유호·작곡가 박시춘
우연히 만나 즉흥적으로 만들어
꽃잎처럼 스러져간 영혼들 위로하고
전투 나선 전우들의 결기 북돋운 곡
유차영 한국콜마홀딩스 전무, 예비역 육군대령 

 


<전우야 잘 자라>는 6·25전쟁 중에 탄생한 대표적인 대중가요다. 나라의 명운을 건 낙동강방어작전과 인천상륙작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북진을 감행해 전쟁 발발 3일 만에 피탈됐던 서울을 3개월 만인 1950년 9월 28일 수복했다. 이때 낙동강·추풍령·한강·38선을 향하여 나아가는 국군과 유엔군의 군화 발자국과 화약 내음을 뒤따라가는 상황을 읊은 노래가 <전우야 잘 자라>다.

6·25전쟁 중 전사·순직한 호국용사들은 언제쯤 평안하게 영면할 수 있을까. 당시 사망·실종된 분들은 16만여 명이다. 시신이 수습된 3만여 분은 전쟁의 총성이 멎은 1955년에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졌고, 13만여 분은 오늘도 조국의 산야에 묻혀 나라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당시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을 위령(慰靈)하는 동시에 살아서 전투에 임하는 전우들의 결기를 북돋우기 위한 참전용사 베테랑들의 추억의 노래가 바로 이 곡이다.
 
이 노래에 묘사된, 꽃잎처럼 떨어져 간 님들은 칠곡·왜관·다부동·유학산·Y고지·형산강·금호강·창녕·남지 등등에서 전사·실종되신 분들을 말한다. 물론 피로 물들었던 조국산하 어느 곳에 잠드신 분인들 여기에 해당되지 않으랴. 전쟁 상황에서 대중가요는 전장과 피란지를 따라 바람결에 일렁거린다. 그런 대표곡이 바로 <전우야 잘 자라>다. ‘치세에는 즐거운 노래, 난세에는 원망의 노래, 망국에는 한탄의 노래’가 불린다고 했다. 그렇다. 전쟁터에서 목숨을 담보로 돌진하는 용사들에게는 당연히 사기와 군기를 고양하는 노랫말과 용진을 추임하는 멜로디가 절실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정부는 6월 28일 한강철교를 폭파하고 임시수도를 7월 7일 대전, 7월 16일 대구, 8월 18일 부산으로 이전했다. 후퇴를 거듭하면서 1950년 8월 1일 낙동강까지 밀려 극한점에서 버티던 방어작전.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서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발판으로 삼아 북진반격을 감행,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한다. 남침 36일 만에 낙동강까지 밀렸다가 13일 만인 9월 28일 다시 서울을 수복한 것. 이때 미국 극동군사령관 맥아더는 9월 15일을 인천상륙작전 디데이로, 5000분의 1의 성공 가능성에 전략적 결단을 내린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수세에 몰렸던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의 발판을 마련한다. 전투화 발자국과 화약 냄새를 뒤로하고 쓰러진 전우의 영면을 기원하면서. 북진(北進).

이처럼 불바람과 총포탄 여운이 감돌던 어느 날, 피란도 가지 못하고 서울귀퉁이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작사가 유호는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겼다는 안도감으로 명동거리를 거닐다가 우연히 벙거지를 눌러쓴 박시춘을 만난다. 그날 둘은 술 도가니에 빠졌다. 명동 뒷골목에서 시작해 필동 박시춘의 적산가옥(敵産家屋)까지 걸어가서 술기운에 젖은 감성으로 밀고 밀리는 전쟁 상황을 읊조렸다. 한 사람은 기타로 가락을 퉁기고, 다른 한 사람은 오선지에 음표와 가사를 적어 나갔다. 최후의 방어선 낙동강을 1절로, 북진행로 추풍령을 2절로, 노들섬 한강수를 3절로, 원한의 38선을 4절로. 적산(敵産)은 귀속재산이라고도 하며, 일본제국주의의 멸망으로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했을 때 미 군정 법령에 의해 미 군정에 귀속된, 국·공유재산 및 일본인들에 의해 축적된 재산을 말한다. 여기서 ‘적’은 일본을 칭한다.

유호(본명 유해준)는 해주에서 출생했으며, 그들 3형제 이름은 황준·연준·해준이다. 황주·연안·해주에서 출생했다고 하여 그 지명의 첫 자를 이름 첫 자로 붙인 것이다. 그는 4살 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했고, 1939년에 제2고등보통학교(경복고)를 졸업하고, 1942년에 일본 제국미술학교 2년을 수료했다. 가수 현인의 고교 1년 후배이다. 1943년 귀국해 동양극장 문예부에서 쓴 극본이 청춘좌에서 공연됐는데, 이때 처음으로 유호라는 예명을 사용했다. 그 후 두 편의 낭독소설을 썼는데, 이것이 경성방송국(KBS)에서 방송된 인연으로 1945년 경성방송국에 입사해 본격적으로 드라마를 쓴다. 1947년 경성중앙방송국은 당시 음악계의 거장 박시춘과 손목인을 앞세워 경음악단을 창단하고, 이때 유호는 박시춘과 인연이 된다.

<전우야 잘 자라>는 국방정훈국을 통해 전군에 보급되었다가 1951년 중국군의 인해전술에 밀린 1·4후퇴 즈음에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라는 구절이 불길하다고 금지곡이 됐다가 해금돼 지금까지 6·25전쟁이 낳은 불멸의 명곡으로 애창되고 있다. 이 노래 작곡가 박시춘은 이난영·반야월과 함께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3대 보물이다.


유차영
한국콜마홀딩스 전무
예비역 육군대령
유차영 한국콜마홀딩스 전무 예비역 육군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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