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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소녀 안네의 은신처 사회적 약자의 안식처 되다

기사입력 2020. 03. 01   14:16 최종수정 2020. 03. 01   14:40

<35> 네덜란드 안네 프랑크의 집

2차 대전 당시 안네 프랑크 가족
나치 정권 박해 피해 숨어살던 곳
1960년 박물관 개장 후 대대적 공사
홀로코스트 비극 생생히 알리고
인종차별 반대 활동 장소로 활용
  

외관을 증축한 안네 프랑크의 집 현재 모습 .   사진=안네 프랑크의 집 홈페이지

안네의 식구들이 숨어 살았던 은신처 앞의 회전식 책장.  사진=www.airportconnection.it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의 프린센흐라흐트 265-267번지에 있는 ‘안네 프랑크의 집’(Anne Frankhuis)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벌어진 유대인 홀로코스트(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저지른 유대인 대학살)를 생생히 증언하는 박물관이다. 이 건축물은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때 네덜란드를 점령한 후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안네 프랑크(Annelies Marie Frank, 1929~1945)와 그녀의 가족을 비롯한 8명의 유대인이 숨어 지낸 곳이다. 안네는 13세 생일 선물로 아버지 오토로부터 받은 일기장에 1942년 6월 14일부터 1944년 8월 1일까지 2년간 일어난 일들을 기록했다. 1944년 8월 4일 나치에 의해 8명은 모두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으며, 안네는 1945년 베르겐-벨젠 강제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1940년 독일에 점령당한 네덜란드

독일이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다. 1940년 5월 10일 독일은 군용기로 수많은 낙하산병을 네덜란드 서부에 투하시켰다. 새벽잠에 빠져 있던 네덜란드는 선전포고도 없이 침공한 독일군에 의해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네덜란드는 약 30만에 달하는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전격전을 펼치는 독일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네덜란드 전역을 점령한 독일은 네덜란드에 우호적인 정책을 폈지만 유대인들의 처우는 달랐다. 신분증에 유대인(Jew)을 뜻하는 ‘J’라는 이니셜로 구분됐으며, 일반 학교 대신 유대인 학교에 다녀야 하고 영화관이나 수영장 출입까지 금지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을 위한 노동 참여의 명목으로 소환장을 받은 수많은 유대인들이 폴란드에 있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로 압송되기 시작했다.



1942년 6월 12일 안네의 첫 일기 한 달 뒤 은둔 생활

안네는 1942년 6월 12일 13살 생일선물로 받은 일기장에 ‘너에게라면 비밀을 모두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아. 제발 내 마음의 언덕이 되어 줘’라고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채 한 달도 안 된 7월 6일 마르고트에게 강제 수용소로 오라는 소환장이 도착하자, 오토는 자신의 집을 개조해 회사 창고와 연결한 후 전체 면적 약 30.25평(100㎡)의 은신처를 마련해 숨기로 한다. 이후 오토의 사업 파트너였던 판 펠스의 가족 3명과 치과의사 프리츠 페퍼가 합류하면서 모두 8명의 유대인들이 나치의 눈을 피해 함께 살았다. 이들은 미프 히스와 그녀의 남편 장 히스, 베프 포스콰일, 빅토르 퀴흘레르, 그리고 조오 클레이만 등이 위험을 무릅쓰고 몰래 가져다주는 식량과 도움으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안네 프랑크의 사진, 사진=안네 프랑크의 집 홈페이지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기대감 높아졌으나 두 달 뒤 나치에 체포

나치 정권의 탄압 아래 어두운 하루하루를 보내던 이들에게 희망을 안겨준 사건은 라디오를 통해 전해 듣게 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었다. 1944년 6월 6일 미군과 영국군이 주축이 된 15만6000명의 연합군이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에 상륙했다. 안네는 이날 일기에 ‘은신처는 지금 흥분의 도가니’라며 ‘어쩌면 9월이나 10월에는 다시 학교에 갈 수 있을지도 몰라’라고 기대감을 내비쳤다.

하지만 두 달 뒤인 8월 4일 나치의 비밀경찰이 은신처를 급습하면서 이들의 희망은 산산조각 났다. 나치가 체포한 8명의 유대인은 네덜란드 동쪽에 위치한 웨스터보르크 강제 수용소로 보내진 뒤, 1944년 9월 6일 모두 아우슈비츠 집단 학살 수용소로 이송됐다. 마르고트와 안네는 독일의 베르겐 벨젠 강제 수용소로 보내진 후 1945년 3월경(최근 연구에 의하면 2월이라는 설도 있음) 장티푸스에 걸려 생을 마감했다. 베르겐 벨젠 강제 수용소가 그해 4월 15일 영국군 11사단에 해방되기 불과 한 달 전이었다. 한편, 은신처를 나치에 고발한 밀고자는 밝혀지지 않았는데, 배식권 암거래를 단속하던 나치방첩대(SD)가 우연히 발견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연구결과가 2016년 나왔다.



1947년 책으로 출판된 ‘안네의 일기’

‘전쟁이 끝나면 가장 먼저 ‘은신처’라는 제목으로 한 권의 책을 쓰고 싶다’(1944년 5월 11일)라고 했던 안네의 일기는 1947년 6월 25일 3036권의 책으로 세상에 처음 나왔다. 이후 70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 출판됐으며 연극과 영화로도 제작돼 전 세계인의 눈시울을 적셨다.

오토가 은신처를 박물관으로 개장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안네 프랑크의 집은 1960년 5월 3일 문을 열었다. 외관의 1, 2층 부분은 개선돼 당시 모습은 없지만 내부는 그대로 보존돼 있다. 은신처로 통하는 입구를 숨긴 회전식의 책장과 안네가 일기에 쓴 지붕 밑의 방도 남아 있다. 안네의 일기 원본과 세계 각국의 언어로 된 안네의 일기 초판본이 진열돼 있다.

올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5주년을 맞아 2017년부터 2018년까지 2년 동안 안네의 가족들이 살던 은신처를 제외한 공간들에 대해 대대적인 공사가 진행됐다. 또 이곳에서는 안네를 덮친 불행한 유대인 박해를 교훈으로 삼아 유대인뿐만 아니라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활동을 실시하고 있다. 해마다 약 100만 명의 관람객들이 이곳을 찾아 불멸의 작가가 된 안네를 만나고 유대인 희생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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