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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특집] 기억해야 할 그 이름 잊지 말아야 할 호국혼

조아미

입력 2020. 02. 27   18:06
업데이트 2020. 02. 27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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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조명하’를 아시나요



“나는 삼한의 원수를 갚았노라. 아무 할 말은 없다.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 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하리라.”

조명하 의사 유언


 

지난해 5월 11일 대만 타이베이시에 새로 설치된 조명하 의사 동상. 사진 제공=조경환 씨
지난해 5월 11일 대만 타이베이시에 새로 설치된 조명하 의사 동상. 사진 제공=조경환 씨


    
청년의 나이는 고작 스물넷. 거사를 치르기엔 너무도 젊었다. 출산을 앞둔 부인과 배 속의 2세를 애써 외면했다. 아기를 보면 마음이 흔들려 일을 그르칠 것 같아서다. 드디어 의거 당일. 청년은 대만에서 수많은 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제의 왕족을 독 묻은 단도로 찌르게 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체포돼 몇 달 뒤 순국한다. 우리는 대부분 그의 이름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기억해야 한다. 조국 독립을 향한 결연한 의지를 가졌던 스물넷의 청년을. 본지는 101주년 3·1절을 맞아 잊힌 독립운동가 ‘조명하(1905~1928)’ 의사를 재조명한다.


조명하 의사. 사진 제공=조경환 씨
조명하 의사. 사진 제공=조경환 씨

 


[인터뷰] 조명하 의사 장손 조 경 환 씨 
“타국에 묻혀있는 할아버지 기억해주길”





“아버지가 태어날 때 할아버지(조명하 의사)가 살아 계셨지만, 아버지는 단 한 번도 할아버지를 뵌 적이 없다고 해요. 그때부터 아버지는 너무도 외롭고 힘든 길을 살다 가셨습니다.”



조명하 의사의 장손 조경환(63) 씨는 조 의사의 외아들인 아버지 고(故) 조혁래(1926년생·2017년 작고) 씨를 떠올리면 늘 가슴이 아리다고 전했다. 독립투사 후손의 삶은 녹록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열아홉이었던 할머니는 재가하고 홀로 남겨진 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의 손에 자라 고아나 다름없었다고.



“혼자 힘으로 삶을 개척한 아버지는 얼굴 한 번 못 본 자신의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평생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애썼습니다. 할아버지를 기리는 아버지의 자세는 정말 존경스러웠습니다.”



1988년 서울대공원에 세운 동상은 국내에 있는 유일한 조 의사의 동상이다. 당시 조혁래 씨와 아들 경환씨는 백방으로 호소한 끝에 동상을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동상 건립 비용도 모두 조 의사 후손들이 감당해야 했다. 당시 그 일로 인해 크게 낙담한 경환 씨는 1992년 호주로 이민을 갔다. 그는 “동상을 건립하면서 정부의 눈치를 봐야 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을 기리면서 왜 정부의 눈치를 봐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며 울분을 토로했다.



2017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간 할아버지의 선양 사업을 해 온 아버지의 뒤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아버지가 창립해 이어온 기념사업회는 최근 새로운 이사진을 구성, 새 단장을 마쳤다.



“유족에 의한 기념사업회이기보다 시스템에 의한 기념사업회가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는 3·1절을 맞아 독자들에게 수많은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달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할아버지는 아직도 90년 이상 대만 땅에 묻혀 계세요. 조국은 아직도 할아버지를 기억조차 못 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반복될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를 비롯해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글=조아미 기자/사진 제공=조경환 씨



 
그날…1928년 5월 14일
대만서 단도 하나로 일왕 장인 척살한 스물넷 청년


1928.5.14 의거 후 체포돼 구타당한 모습의 조명하 의사
1928.5.14 의거 후 체포돼 구타당한 모습의 조명하 의사


1926.9-1927.11  일본 유학시절의 조명하 의사(왼쪽)
1926.9-1927.11 일본 유학시절의 조명하 의사(왼쪽)

1910년 일제가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자 황해도 출신 조명하 의사는 고향을 떠나 식민지가 된 조선을 위해 싸우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일본 유학 중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로 가기로 마음먹은 의사는 1927년 11월 중간 기착지인 대만에 도착해 타이중 시의 한 차 상점에서 ‘명하풍웅’이라는 가명으로 일했다. 그는 대만에서도 일본 통치자가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것을 목격하고 조국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동포를 생각하며 대만 총독을 처단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던 중 1928년 5월 14일, 의외의 기회가 찾아왔다. 히로히토(裕仁) 일왕의 장인이자 육군 대장인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王)가 대만을 방문한다는 정보를 듣게 된 것이다.

당일 오전 9시50분. 구니노미야를 태운 차량 행렬이 지사 관저를 출발해 타이중 주립 도서관을 지날 때, 조 의사는 환영 인파 속에서 뛰쳐나와 독을 발라 가슴 속에 숨겨뒀던 단도를 꺼내 들고 차에 뛰어올라 척살을 시도했다. 구니노미야는 검에 묻은 독으로 인해 8개월 만인 이듬해 1월 복막염으로 사망한다.

거사 현장에서 일제에 체포된 조 의사는 주위의 군중을 향해 외쳤다. “당신들은 놀라지 말라. 나는 대한을 위해 복수하는 것이다.”

조 의사는 ‘황족 위해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1928년 10월 10일 타이베이 형장에서 순국했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대양휴머니티칼리지 교수
조명하 의사 연구회 초대회장
 

“독립운동 ‘4대 의거’ 
주목 못 받아 안타까워 
선열 희생정신 배워야”
  

호사카 유지 교수.
호사카 유지 교수.

 
호사카 유지(64) 세종대 대양휴머니티칼리지 교수는 지난 2018년 7월 7일 발족한 ‘조명하 의사 연구회’ 초대 회장이다. 일본인으로 태어났지만 한국 국적을 취득해 한국인이 된 학자 호사카 교수는 조 의사를 어떻게 평가할까.

호사카 교수는 조 의사를 2년 전 처음 알게 됐다. 2018년 5월 14일 조 의사 의거 90주년을 맞아 대만 슈핑(修平)과기대 김상호 교수로부터 조 의사 관련 세미나에 초청된 것. 대만에 30년 넘게 거주하고 있던 김 교수도 불과 몇 해 전 대만 현지인으로부터 조 의사에 대해 처음 듣고 그의 업적을 연구하던 차였다. 이후 호사카 교수도 연구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

지금까지 논란이 되는 것 중 하나는 조 의사의 ‘단독 의거’가 가능했느냐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 호사카 교수는 “좀 더 상세한 연구가 필요하지만, 조 의사는 임정에 있는 김구 선생을 만나기 위해 중국으로 가는 도중에 대만으로 간 것으로 알려졌다”면서 “동향 선배이자 임정 출신인 김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의거 기회를 잡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확한 자료가 없어 단독 의거인지 누군가 배경이 있는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아, 단독 의거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호사카 교수는 당시 대만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장소였다고 덧붙였다. “일왕의 왕가가 많이 찾는 장소가 대만이었습니다. 조선에서는 독립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가지 않았어요. 반면 대만은 일제에 의해 완벽하게 통제됐습니다. 당시 대만에 신사(神社)가 만들어졌어요. 왕족이 곧 신입니다. 조 의사가 척살한 구니노미야의 작은아버지 요시히사가 바로 대만의 신이었죠. 일제는 요시히사의 죽음으로 인해 대만이 은혜를 입었다고 교육했어요. 구니노미야는 일제가 신성시하던 왕족의 일원으로 일왕의 장인이라 일제에 큰 충격을 줬습니다.”

조 의사의 의거가 그간 국내에 잘 알려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호사카 교수는 “조 의사의 의거 장소가 독립운동의 주 무대가 아닌 대만이었다는 점과 단독 거사로 의거를 증명할 조직이 없었던 점, 1992년 대만과의 단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그간 조 의사의 의거는 국내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고 설명하면서 “조 의사는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낸 뒤 ‘읽고 바로 태워라’라고 할 정도로 문서나 자료를 남기지 않았다.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그랬다”고 말했다.

조 의사의 의거 이후 일본은 한 달간 보도를 통제했다.

“구니노미야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기록하지 않았어요. 완전히 숨겼습니다. 의거 이후 대만 총독이 교체됐고, 대만의 경찰총장도 바뀔 정도로 당시 의거는 일제에 큰 충격을 줬습니다. 대만에 대한 일제의 제재가 크게 바뀌는 큰 사건이었죠.”

또한 조 의사의 의거 이후,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뒤따랐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왕족을 노리는 최초의 암살입니다. 독립기념관은 일제강점기 때의 ‘4대 의거’를 안중근(1909년 10월)·조명하(1928년 5월)·이봉창(1932년 1월)·윤봉길(1932년 4월) 의사의 의거로 명하고 있어요. 단독 의거라 해도 임시정부는 조 의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조소앙 선생의 『유방집(遺芳集)』에 조 의사의 이름이 거론됩니다. 임정이 인정한 의거인거죠.”

특히, 호사카 교수는 “윤봉길 의거에 감격한 중국 장제스가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고, 카이로회담에 참석해서는 대한의 독립을 약속해 달라고 했다. 조명하·이봉창·윤봉길 의사의 거사가 이어져 ‘조선 독립’이라는 큰 약속이 만들어진 만큼 조 의사의 시작이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호사카 교수는 3·1절을 맞아 조 의사를 통해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 많다고 강조했다.

“24세 젊은 나이에 순국했어요. 조국의 주권 회복을 위해 나머지 인생을 버린 거죠. 참으로 거룩한 업적입니다. 이렇듯 당시엔 젊은 독립운동가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선열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현재의 대한민국이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결코 그들의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조명하 의사 연구회를 이끌어가는 수장인 그는 “현재 세종대 기금을 얻어 『조명하 의사 자료집』을 준비 중이며, 오는 5월쯤 발간할 예정”이라면서 “앞으로도 조 의사 연구를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 연구, 일제강점기 대만 연구, 연구발표회 개최 등을 활발하게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글=조아미/사진=양동욱 기자

조아미 기자 < joajoa@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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