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왕릉으로 읽는 삼국역사

성읍 국가 탈피…중앙집권 체제 고대국가 발돋움

입력 2020. 02. 17   15:39
업데이트 2020. 02. 17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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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파사이사금


오릉 서쪽의 숭의문. 능역을 드나드는 출입문이다.  필자 제공
오릉 서쪽의 숭의문. 능역을 드나드는 출입문이다. 필자 제공

신라 4대 왕 탈해이사금 재위(57∼80) 당시 조정 안 권력 구조는 매우 복잡했다. 신라를 건국한 박씨 왕족과 용성국(왜)에서 망명 온 석탈해파가 궐내 요직을 번갈아 차지하며 양보 없는 대치를 계속했다. 마한 왕족으로 신라에 귀순해 대보(재상)직을 수행 중인 김알지도 두 왕족과 버금가는 무시 못할 세력으로 급성장했다. 62세에 즉위해 86세가 된 탈해왕은 위중한 병에 들었다. 대통 승계자를 못 정한 상태에서 임금의 중병은 자칫 피를 부를 수 있다.


군주 국가에서 왕위 계승 우선권은 언제나 금상의 아들한테 있었다. 탈해왕의 아들 구추는 후궁 출생이었다. 3대 왕 유리이사금(박씨)도 두 후궁에게서 일성과 파사 두 아들을 각각 얻었다. 탈해왕에게는 처조카였다. 누가 왕이 될 것인가. 이때 김알지 세력이 들고 나섰다.

“유리왕의 둘째 아들 파사가 일성보다 총명하고 인물이 뛰어나니 차기 왕으로 즉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탈해 아들도 아니고 유리의 장남도 아닌 둘째 왕자 파사였다.

파사는 갈문왕 허루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허루가 김알지의 아들이었으니 파사는 실세 김알지의 손녀사위였다. 신라 갈문왕은 조선시대 대원군과 동등한 위상이다. 조정 권력을 쥐고 있던 김씨 세력이 박씨 왕족과 결탁해 석씨 즉위를 저지한 것이다.

파사의 즉위로 박씨는 24년 만에 왕권을 회복했고, 김씨는 훗날 왕위 등극의 기반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권력의 향배는 누구도 예단할 수 없어 오리무중 속 결말이 도출되기도 한다.

5대 왕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이하 파사왕)의 즉위 과정은 고구려, 백제, 가야 등의 대통 승계와도 무관치 않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장가를 잘 간 덕분에 이사금이 된 파사도 재위(80∼112)하는 33년 동안 온갖 자연재해와 이웃 부족국가 간 전쟁에 시달려 편한 날이 없었다. B.C. 57년 박혁거세거서간이 6촌 부족국가를 규합해 나라를 건국하긴 했지만 아직도 변방에는 정복 안 된 소국가가 여럿이었다. 신라라는 국호도 개국 초부터 사용한 게 아니다. 사로·서나벌·사라·서나·서야·서야벌·서벌·서라벌 등으로 불리다가 김알지가 시림숲 금궤 속 알에서 태어난 후에는 계림으로 고쳐 부르기도 했다.

국호 신라를 처음 사용한 건 22대 지증마립간(재위 500∼514) 4년(503)부터다. 덕업일신(德業日新)에서 ‘신(新)’자를, 망라사방(網羅四方)에서 ‘라(羅)’자를 취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덕업이 날로 새로워져 사방을 두루 덮는다’는 의미다. 일반적 통념으로 초기 왕부터 56대 경순왕까지 992년 역사를 통틀어 신라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파사왕이 즉위하자 신라 왕실에는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이복형 일성(태자)은 분함을 참지 못하고 이역만리 왜국으로 망명길을 떠났다. 탈해왕 아들 구추도 벽지 어디론가 은둔해 구차한 목숨을 부지했다. 왕권이 안정되려면 역모의 소지가 있는 왕손은 모두 제거됐기 때문이다. 파사왕은 비통에 잠겼다. 그러나 인군이란 사사로이 슬퍼할 수만도 없는 자리였다. 일순간 방심하면 변방 소국 침략이 계속됐고 가뭄·홍수·지진 등의 자연재해가 끊이질 않아 백성들 원성이 도처에서 자자했다.

파사왕에게는 박·김씨 세력 간 야합으로 금상의 아들과, 이복형 태자를 제치고 즉위했다는 게 마음의 앙금이었다. 선왕들이 왕이란 묘호를 못 쓰고 제사장이나 부족 추장을 뜻하는 거서간·차차웅·이사금 등으로 불리는 것도 죄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당시 신라의 국토 규모나 백성 수를 감안할 때 감당해야 하는 수모이기도 했다. 순리를 역행하며 왕이 된 그에게는 강력한 왕권 회복이 당면 과제였다. 그것은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으로 백성들 신망을 회복하는 길뿐이었다.
오릉 안 대나무 숲길. 시조 왕비가 태어난 알영정 옆에 있다. 필자 제공
오릉 안 대나무 숲길. 시조 왕비가 태어난 알영정 옆에 있다. 필자 제공

파사왕이 왕위에 있던 때는 백제 3대 기루왕(재위 77∼128), 고구려 6대 태조왕(재위 53∼146)과 동시대다. 가야는 김수로가 42년 즉위해 199년 세상을 떠나며 158년간 재위했다고 하는데 이 또한 역사의 수수께끼다. ‘가락국기’를 면밀히 추적하다 보면 당시 가야와 삼국 간 역법(曆法) 차이에서 기인했음을 알게 돼 의문은 일거에 해소된다. 가야의 임나일본부설과 함께 별도로 상세히 기술될 내용이다.

열국시대 4국 왕 모두는 영토 확장에 대한 열망이 집요했다. 파사왕 15년(94) 수로왕이 신라 마두성(경남 거창)을 2년 간격으로 공격해 오자 왕이 직접 기병을 지휘해 패퇴시켰다. 수로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며 화친을 청하자 파사왕이 수용했다. 양국 간 전쟁이 멈추지 않았던 백제와도 동맹을 맺어 모처럼 신라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전쟁이 빈번한 나라 백성일수록 목숨은 추풍낙엽이고 민생은 피폐되고 만다. 반면 장정이 동원돼 생업을 그르치고 부역에 시달리는 전쟁 속에서도 군사적으로는 명암이 교차한다. 생사고비를 넘나드는 전투에서 살아남은 군대가 강군이 되기 때문이다. 주변 국가들과의 다양한 전투 경험이 축적되자 어느덧 신라군은 멀리 왜국도 넘볼 수 없는 정예군으로 변모했다.

강력한 군사력이 뒷받침된 파사왕의 통치에는 탄력이 붙었다. 재위 23년(102) 음집벌국(경북 울진·안강) 실직국(강원 삼척) 압독국(경북 경산)을 차례로 쳐 병합시켰다. 108년에는 다벌국(대구) 초인국(경북 기계·초계)이 항복해 왔다. 111년에는 백제 내기군(郡)을 점령해 다시 적대국으로 대치하게 됐다. 이 같은 파사왕의 치적으로 신라는 성읍 국가 단계를 탈피해 중앙집권 체제 고대국가로 발돋움하게 됐다.

같은 시기 고구려 태조왕은 중국 한나라 요동 6현을 공략했으나 요동태수 경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후퇴하고 말았다. 승승장구하던 고구려 군대의 뼈아픈 패전으로 태조왕의 영토 확장 정책은 한동안 주춤하게 됐다. 백제는 마한의 부흥운동군 소탕 작전으로 여념이 없었다. 108년 봄에는 극심한 가뭄이 들어 백성들끼리 식인하는 목불인견의 참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가야 수로왕은 경남 전역에 산재한 부족을 정복해 중앙집권국으로 통치하려 했으나 부족장들의 반발이 워낙 거세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서기 112년 10월 파사왕이 세상을 떠나자 태자 지마(祗摩)가 6대 왕으로 등극했다. 석씨 후손은 왕권 경쟁에서 점점 멀어지고, 박·김씨 간 왕위 쟁탈전이 본격화되면서 신라 사회는 양극화 현상이 한층 심화됐다. 설상가상으로 왜국에 망명 중인 태자 일성의 귀국설이 나돌면서 신라 왕실은 또다시 격랑 속에 휘말리고 만다.

5대 왕 파사이사금은 시조 능이 있는 경주시 탑동 67에 예장됐다. 박혁거세거서간과 알영 왕비, 2대 남해차차웅, 3대 유리이사금과 함께 다섯 능이 있어 오릉(사적 제172호)으로 불리게 되었다. 모두 박씨 왕의 능이다. 봉분 서쪽의 숭의문은 능역에 들어가는 유일한 출입문이다. <이규원 시인 『조선왕릉실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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