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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사 2월 18일] 1967년 원폭 개발 오펜하이머 타계

입력 2020. 02. 17   09:53
업데이트 2021. 02. 17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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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개의 태양이 한번에 폭발해 그 섬광(방사능)이 전능한 하느님의 영광인 하늘로 날아간다면… 나는 죽음의 신이요, 세상의 파괴자다."

If the radiance of a thousand suns were to burst at once into the sky that would be like the splendour of the Mighty One… I am become Death, the Shatterer of Worlds.


제2차 세계대전 중 원자폭탄 개발을 지휘했던 미국의 세계적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는 원자탄 실험 성공 후 산스크리트어로 된 고대 인도의 영웅시 ‘바가바드 기타(The Bhagabad Gita)’를 인용하면서 자신을 향해 스스로 후회하고 저주하는 말을 내뱉었다.



비록 그가 개발을 이끈 원자폭탄이 전쟁을 끝내는 ‘공신’의 역할을 했다고 해도, 그는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 사막에서 실시된 역사적인 첫 핵 실험을 본 후 이제 지구는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한탄스럽게 "이 세상은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We knew the world would not be the same)"라며 핵폭탄이 쓰일 미래의 전쟁을 상상하는 것조차 견딜 수 없이 끔찍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 원자폭탄을 투하한 결과로 당초 예상한 2만 명보다 훨씬 많은 사상자가 나오자 트루먼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제 손에 피가 흐르는 것 같다"며 양심의 가책을 호소했다.


1949년 소련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수소폭탄을 개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오펜하이머는 원자력위원회 일반자문회의(General Advisory Committee of the Atomic Energy Commission) 의장(1947~52)으로 재직 중이었고, 이 수소폭탄 개발계획에 반대했다. 이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매카시즘 선풍이 한창이던 1954년 4월 12일 청문회에 올라 그해 6월 28일 보안 부적격이라는 ‘유죄’ 평결을 받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가 복권된 것은 1963년 존슨 대통령이 원자력위원회의 ‘엔리코 페르미 상’을 수여한 후였다.


"과학이 결코 전부가 아니다. 그러나 과학은 아름다운 것이다(Science is not everything, but science is very beautiful.)"이라는 명언을 남긴 오펜하이머.


1904년 4월 22일 독일에서 이주한 부유한 유대계 무역상의 아들로 뉴욕에서 태어나 비록 노벨상은 받지는 못했지만, 물리학계에 그 누구보다 뚜렷한 업적을 세운 그가 1967년 2월 18일 암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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