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왕릉으로 읽는 삼국역사

석탈해 사위 삼고 왕위 계승…‘천년왕국’ 단초 이뤄

입력 2020. 01. 23   16:16
업데이트 2020. 01. 23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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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남해차차웅


오릉을 둘러싸고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 사시사철 솔향기가 그윽하다.   필자 제공
오릉을 둘러싸고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 사시사철 솔향기가 그윽하다. 필자 제공
  
신라 백제 가야가 건국하기 전 한반도 중부 이남에는 마한·진한·변한의 세 나라가 오래 전부터 존속해 왔다. 54개로 분할된 이들 삼한 소국들은 아직 온전한 국가 체계를 갖추지 못한 성읍 국가 단계였다. 소국 모두가 주변 정세에 따라 왕권이 수시로 교체되고 부침을 거듭하는 허약 체질이었다. 소국들 간 이합집산은 물론 변경 분쟁도 잦아 대규모 유민들이 집단이동을 반복했다. 토착민들에겐 자주 있는 일상사여서 그들과 쉽게 동화됐다.
  
삼한 중 진한은 오늘날의 강원 남부와 경북 지역에 오랜 옛날부터 터를 잡고 있었다. 진한의 12소국 가운데 제일 강한 부족 국가는 경주의 사로국이었다. 이 사로국에는 양산촌·고허촌·진지촌·대수촌·가리촌·고야촌 등 6개 마을 촌장이 연맹체로 각기 나라를 통치해 왔다. 진한의 소국 중 큰 곳은 4000∼5000가구였고 작은 데는 600∼700가구여서 마한보다 소규모였다.

긴장 속에 살아가던 진한 땅에 갑작스러운 지각 변동이 생겼다.

B.C. 220년경(2240년 전) 중국 연(燕)나라 한족(漢族)들이 진시황의 폭정을 피해 바다 건너 진한으로 망명해 온 것이다. 진한 12국이 한데 뭉쳐 수백 명씩 떼 지어 몰려오는 그들을 저지하려 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한족들은 조국을 잊고 진한 땅에 정착해 진한어로 소통하며 진한 사람이 되어 갔다.

진한의 근심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30년 뒤인 B.C. 190년경(2210년 전) 이번에는 북방의 한족이 진한으로 대거 망명해 온 것이다. 위만조선에 망한 기자조선의 준왕이 유민 무리를 이끌고 진한에 들이닥친 것이다. 이들 한족은 경주의 넓은 지역에 분산해 살며 여섯 마을을 이루었다. 바로 육촌(六村)이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는 육촌 가운데 고허촌 출신이다.

예부터 주인이 방심하면 집안에 든 과객이 설친다고 했다. 주거가 안정되자 한(漢)족과 한(韓)족은 사사건건 충돌하며 주도권 투쟁으로 일관했다. 수세에 몰린 건 오히려 토착민이었다. 진한 12국도 물러서지 않고 가세했다. 어느새 진한 영토는 이들 3파전의 전장으로 돌변했다. 그러나 두 한족은 이미 망국의 통한을 경험한 유민들이어서 자생력이 월등했다. 이 판국에 혁거세는 6촌장의 전폭적 지지로 신라를 건국했고 61년을 거서간(왕)으로 재위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이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부왕과 모후, 왕족들의 주검을 7일 만에 수습한 왕자 남해(南解·?∼A.D. 24)는 A.D. 4년 3월 2대 왕으로 즉위했다. 이 해 고구려는 2대 유리왕 31년, 백제도 1대 온조왕 22년이었다. 남해는 등극하며 “두 성인(혁거세와 알영 왕비)이 세상을 떠나고 내가 백성들의 추대로 즉위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라고 심경을 토로했다. 왕세자가 아니었음을 시인한 것이다.

이즈음 사람들에게는 삼국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성이나 이름이 없었다. 경주 나정 우물 근처의 알에서 태어났다는 혁거세도 성이 없었다. 광채 나는 알의 크기가 박(瓠=표주박 호)과 같다 해 박(朴)이라는 성을 얻게 되었다. 박씨 시조가 되는 유래다. 혁거세는 ‘광명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의미고 거서간은 ‘서쪽에 사는 왕’을 뜻한다. 진한에서 마한 왕을 ‘서쪽 왕’이라고 불러 왔던 습속의 잔재다.

남해왕이 재위(4∼24)하는 동안 신라에는 유달리 자연 재해가 극심했다. 혜성이 떨어져 백성들이 공포에 질리고 지진이 자주 나 땅을 쩍쩍 갈라 놓았다. 메뚜기 떼가 창궐해 농사를 망치는가 하면 겨울 홍수와 가뭄이 겹쳐 국토를 황폐화시켰다. 백성들은 제사장이자 신으로 떠받드는 왕을 원망했다. 다급해진 왕이 혁거세 시조 묘(廟·사당)를 세우고 여동생 아로에게 제사를 주관토록 했으나 효험이 없었다.

남해왕 9년(12)에는 고구려(유리왕)가 중국 신(新·9∼23) 나라에 맞서는 큰 충돌이 벌어졌다. 신이 흉노(匈奴·B.C. 3세기 말∼A.D. 1세기 말 중국 북방에서 맹위를 떨치던 기마 유목민족)국 정벌에 참전을 요구하자 고구려는 단호히 거부했다. 오히려 신의 요서대윤 전담(田譚)을 살해하고 영토 확장을 꾀했다. 격노한 신나라 왕 왕망이 하구려(下句麗)로 강등해 비칭했지만 고구려는 개의치 않았다. 고구려 개국 이전의 구려국 존재를 입증하는 사서의 기록이다.

백제 시조 온조왕(재위 B.C. 18∼A.D. 28)은 45년을 재위했다. 고구려 시조 묘(廟)를 건립하고 하남 위례성에서 한산(漢山)으로 천도하며 주변국과의 전쟁에서 거듭 승리했다. 재위 27년(9)에는 마한을 공격해 멸망시키고 다루(2대 왕)를 태자로 책봉해 왕권을 안정시켰다. 이때부터 한강 유역을 점유하려는 신라와의 국지전이 수시로 발발했다. 신라로서는 서부 해안의 요충지 확보가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는 중요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남해왕이 21년 동안 재위하며 이뤄 놓은 괄목할 만한 치적은 별로 없다. 그는 항상 비명에 간 부왕의 최후를 상기하며 죄책감에 시달렸고 권력 투쟁으로 조정 신료들이 도륙될 때마다 깊은 절망에 빠졌다. 동예 백제 왜국의 침범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당할 때면 “이는 내게 덕이 없는 탓이로다.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라며 자신을 질책했다.

남해왕은 박씨가 아닌 석탈해(4대 탈해이사금)의 인물됨을 간파하고 장녀 아효를 출가시켜 사위로 삼았다. 이는 박·석·김의 세 성씨가 무탈하게 왕위를 승계하며 천년 왕국을 이어가는 데 결정적 단초로 작용하게 된다.

남해 사후 조정에서는 차차웅(次次雄)이란 왕호를 지어 올렸다. 삼국유사에는 ‘차차웅이 존장의 칭호로 오직 임금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라고 기술했다. 김대문(진골 출신 귀족으로 681∼687년 화랑세기 저술)은 ‘신라 초기 신정·제사적 성격을 나타내는 칭호’라고 썼다. 차차웅을 자충(慈充)이라고도 했는데 스님을 지칭하는 ‘중’의 어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경주 남산 서북 산록에 있는 오릉. 임금의 왕호를 알 수 없어 차례대로 능 번호를 부여했다. 필자 제공
경주 남산 서북 산록에 있는 오릉. 임금의 왕호를 알 수 없어 차례대로 능 번호를 부여했다. 필자 제공

남해차차웅의 능은 부왕 부부의 능이 있는 오릉 안에 있다. 오릉은 경주시 외곽 남산의 서북 산록에 정서향으로 용사돼 있다. 중앙의 봉토분 하나를 중심 삼고 묘(卯·동) 유(酉·서) 오(午·남) 자(子·북)의 사방으로 묘를 쓴 형태다. 서에서 동으로, 남에서 북으로 능 번호를 부여했다. 1호분 서총(西塚)이 가장 크며 남서쪽이 돌출돼 있다. 2호분 남총은 표주박 모양이고 3호분 중총이 두 번째로 크다. 4호분 북총은 좌우 축(軸)이 길며 5호분 동총은 남북으로 타원형이다.

오릉은 모두 적석목곽분(돌무지 나무덧널무덤)으로 신라 왕실만의 특이한 장묘 형태다. 평지에 나무 덧널을 만들고 그 위에 돌을 쌓은 뒤 흙을 다져 봉분을 만든 묘를 적석목곽분이라 한다.

신라 왕릉을 감싸고 있는 능역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사시사철 푸르다. 능을 찾는 참배객들에게 천년 왕국 역사를 뒤돌아보게 하는 각성제와도 같은 솔향기가 코끝을 저민다.

<이규원 시인 / 조선왕릉 실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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