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

獨 비스마르크호 격침 큰몫 한 뉴질랜드 해군

입력 2019. 12. 17   16:25
업데이트 2019. 12. 17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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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끝>뉴질랜드(하)


데번포트 반도에 장병묘역·해군박물관
1·2차 세계대전 해상전투 실상 보여줘
땅굴 요새는 일본군 상륙기도 차단해
오클랜드박물관 한국전쟁 전시실
한강의 기적 이룬 현대사에 자부심 

 

뉴질랜드 오클랜드항 건너편 데번포트 반도에 있는 군사 요새의 장거리 해안포.    필자 제공
뉴질랜드 오클랜드항 건너편 데번포트 반도에 있는 군사 요새의 장거리 해안포. 필자 제공

인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였다. 대부분 국가가 전쟁으로 건국했고 전쟁 패배로 소멸했다. 한반도의 우리 선조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5000년 역사에서 무려 930여 회의 외침(外侵)을 당했다. 평균 5년에 한 번 전란에 시달렸다. 그러나 강인한 한민족은 사라지지 않았고 오늘날까지 단일 민족의 혼을 이어가고 있다. 세계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례다. 미국·러시아·영국과 같은 대국으로부터 뉴질랜드·룩셈부르크와 같은 소국에 이르기까지 역사박물관 전시물은 대부분 전쟁으로 시작해서 전쟁으로 끝났다. 그 전쟁은 무자비했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런 살벌한 약육강식의 무대에서 ‘평화’를 구걸하기보다는 유비무환의 자세로 당당하게 전쟁을 미리 준비한 민족만이 현재까지 살아남았다. 세계 60여 개국의 격전지와 군사박물관을 직접 답사하고 필자가 내린 결론이다. 


 
오클랜드 한국교민의 조국에 대한 자부심

뉴질랜드 인구의 3분의 1 정도인 170만 명이 모여 사는 항구도시 오클랜드! 깨끗하게 정돈된 시내에는 뜻밖에 한글 간판이 많다. 슈퍼마켓에는 예외 없이 한국 식품들이 있고, 가격 또한 비싸지도 않다. 상점에서 만난 교민 K씨 왈, “세일 기간에는 한국보다 더 저렴한 가격에 라면·즉석밥을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는 30여 년 전 뉴질랜드로 건너왔다. 한국인 특유의 근면함과 성실성으로 현재는 안정적인 삶의 기반을 갖추었다. 영주권자인 그는 아내와 동시에 노후연금을 받고 있다. 지금은 낚시와 골프로 소일하고 있지만, 가끔은 숨 가쁜 한국 사회가 그립기도 하단다. 또 선진국으로 도약한 한국 덕분에 뉴질랜드 교민의 사회적 위상은 한층 더 높아졌다고 한다. 모국의 국격에 따라 해외이민자의 대접도 다른 듯했다.

오클랜드박물관의 한국전쟁 전시실
오클랜드박물관의 한국전쟁 전시실


뉴질랜드군 참전과정과 1950년대의 한국


높은 언덕 위의 ‘오클랜드박물관’은 역사·문화·예술·사회 분야를 망라한 종합박물관이다. 하지만 전시물의 4분의 1 이상이 전쟁 역사 기록이다. 뉴질랜드와 한국의 최초 인연은 1950년 6·25전쟁으로 맺어졌다. 뉴질랜드는 유엔으로부터 지상군 파병 요청을 받았다. 파병부대원 1000명 모집에 5982명의 지원자가 몰려들었다. 엄선된 청년들에게 포병 교육을 완료한 후 장교 38명, 병사 640명으로 제16 야전포병연대를 창설했다. 더불어 해군 프리깃함(호위함) 2척도 미 극동해군사령부 지휘하에 참전했다. 파병 연인원 3794명 중 전사 23명, 부상 79명, 실종 1명의 피해가 있었다.

참전 장병 중 원주민 마오리족도 많았다. 이들은 이국땅 전선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전통 민요를 부르곤 했다. 이 애달픈 곡조에 가사를 붙여 만든 노래가 바로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으로 시작하는 ‘연가’다. 남태평양의 마오리족 민요는 이처럼 전쟁을 통해 한반도로 건너왔다.

오클랜드박물관 한국전쟁 전시실의 참전군인 그루펜 씨 증언록은 1950년대 한반도 상황을 이렇게 언급했다. “1951년 3월, 내가 본 한국은 거리마다 부모 잃은 고아들로 넘쳐났다. 우리는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데려와 하우스키퍼로 활용했다. 굶주림만 해결해 주어도 온갖 궂은일을 그들이 다 해치웠다. 또한, 가족을 먹여 살리고자 몸 파는 여성들이 항상 부대 주변에 몰려들었다. 야전식량 한 봉지에 그들의 자존심은 쉽게 땅에 내려졌다.” 그리고 반세기의 세월이 흘렀다. 오늘날 오클랜드 시내에는 수많은 한인교포·유학생·사업가들이 활보하며 “I am Korean!”을 당당하게 외친다. 한인 단체관광객들이 빠짐없이 들르는 곳 역시 오클랜드 박물관이다. 이들이 한국전쟁 코너를 보면서 전쟁의 폐허를 극복하고 ‘한강의 기적’을 이룬 위대한 대한민국 현대사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꼈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다.


100년 전 축성된 오클랜드 항만 땅굴 요새

오클랜드항 수로는 길쭉한 반도와 작은 섬들로 둘러싸여 있다. 특히 항만 건너편 ‘데번포트(Devonport) 반도’에는 전몰장병묘역과 해군박물관이 있고, 120년 전부터 단계적으로 축성된 군사 시설들이 무수히 남아있다. 해군박물관은 제1·2차 세계대전 해상전투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북대서양에서 독일 전함 비스마르크호를 격침하는 데 뉴질랜드 해군 함정이 결정적 역할을 했단다. 당시 적 포탄이 이 함정 옆구리를 뻥 뚫었다. 천만다행으로 불발탄이었다. 그 물증으로 찌그러져 떨어져 나간 함정 철판을 전시해 두었다.

해군박물관 뒷산은 국가전쟁유적지로 지정돼 있다. 이곳은 1800년대 말부터 땅굴 요새를 건설해 장거리 해안포 8문과 소구경 화포들을 배치했다.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보강된 요새와 주변 섬의 벙커는 일본군의 상륙 기도를 사전 차단했다.

데번포트 반도 해안포대 요새 조감도
데번포트 반도 해안포대 요새 조감도


전쟁역사보다 관광명소 관심 많은 여행객

땅굴 요새 답사 후 언덕을 내려오면서 태극기가 휘날리는 단독주택을 발견했다. 한국 교민의 집으로 생각하고 쪽문에서 큰소리로 주인을 불렀다. 순간 송아지만 한 큰 개 2마리가 으르렁거리며 달려 나왔다. ‘물러서면 다친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서양 개들은 덩치는 크지만 대체로 순하다는 것을 믿는 수밖에. “Nice Doggy! Nice Doggy!”를 외치며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개 머리를 쓰다듬었다. “킁킁”거리며 계속 주변을 돈다. 적대 의사가 있다면 공격할 자세다. 이때 뜻밖에 집주인 뉴질랜드인이 나타났다. 태극기 사연은 “평창 동계올림픽 축하와 한반도 평화 기원”의 의미란다. 세계 역사에 관심 많은 주택 주인은 100여 개의 국기를 가졌으며 필요시 해당국의 국기를 게양한단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침공 시 의도적으로 러시아 국기를 거꾸로 매달았다. 당연히 러시아 여행객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지만, 불법 침공을 반박하는 기회를 얻었다고 한다.

오클랜드로 돌아오는 선상에서 많은 한국 여행객들을 만났다. “선생님! 역사공원에서 항구를 보니 경치가 참 좋죠. 혹시 시내 재래시장 위치를 모릅니까? 그 나라를 알려면 이름난 관광명소를 가보아야 하는데….” 똑같은 군사유적지를 돌아보았지만, 전쟁 역사에 무관심한 사람들은 오직 뉴질랜드의 아름다운 자연경관만을 기억할 뿐이었다.


<신종태 통일안보전략硏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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