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

1차 대전 중 10만 청년 전쟁터로…후유증 끝 국가 정체성 확립하기도

입력 2019. 12. 10   15:40
업데이트 2019. 12. 10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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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뉴질랜드(상)



웰링턴 전쟁기념관 갈리폴리전투 기념비. 비 하단부에 뉴질랜드·터키군 군모가 보인다.
웰링턴 전쟁기념관 갈리폴리전투 기념비. 비 하단부에 뉴질랜드·터키군 군모가 보인다.


신이 마지막으로 숨겨놓았다는 축복의 땅 뉴질랜드! 호주에서 남동쪽으로 1920㎞ 떨어진 이 나라는 2개의 큰 섬과 부속 도서로 된 나라다. 총면적 26만8000㎢에 인구는 450만 명에 불과하다. 한반도 1.2배의 국토를 가졌지만, 한국 12분의 1 정도의 사람들만 살고 있다. 지구 상 가장 청결한 자연환경을 가졌고 안보 위협도 없는 뉴질랜드의 연 국민개인소득은 4만2000달러 수준. 현재 이 나라에는 약 3만 명의 교민이 있으며 해마다 수많은 한국 관광객들이 방문하고 있다. 군사력은 현역 8950명(육군 4500, 해군 2050, 공군 2400명)과 예비군 2200명을 보유하고 있다.
100년 분쟁 역사를 거쳐 탄생한 뉴질랜드

인류 조상은 약 70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남반구 밑 뉴질랜드는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최후의 섬이었다. 이 섬은 13세기경 태평양 폴리네시아 군도의 마오리족이 건너와 처음 살기 시작했다. 1642년 네덜란드 탐험대가 최초의 유럽인으로 도착했지만, 원주민과의 충돌로 상륙을 포기했다. 그 후 1769년 10월 6일, 영국 선장 쿡이 뉴질랜드를 답사한 뒤 영국 국왕의 소유로 선포했다. 1800년대 백인들의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자 이 섬도 약육강식의 살벌한 분쟁의 터로 변했다.

특히 원주민 부족 간 다툼은 창과 칼을 사용한 소규모 싸움에서 화승총(머스킷 총) 유입으로 대량 살육전으로 변했다. 1807년부터 1842년까지 35년 동족상잔(머스킷 전쟁)으로 원주민 인구가 대폭 줄었다. 1845년에는 토지소유권 문제로 또다시 마오리족과 영국군 간 전쟁이 발발했다. 1만8000명의 영국군은 저항군을 섬 끄트머리로 밀어붙였다. 마오리 전사 5000결사대가 필사적으로 항전했지만 결국 무릎을 꿇었다. 27년간 신의 보물단지를 핏빛으로 얼룩지게 한 이 분쟁(1845~1872)을 ‘뉴질랜드전쟁’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인간의 이권 다툼은 상호 ‘윈-윈’하는 협상보다는 대부분 강자의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해 왔다. 이 전쟁의 마지막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마오리 전사들이 굴비처럼 포승줄로 꽁꽁 묶여 있는 사진들을 박물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강자의 논리가 곧 법이고 약자는 그 논리에 따를 수밖에 없는 국제사회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다.


웰링턴 언덕 위의 웰링턴 전쟁기념관 건물 전경.
웰링턴 언덕 위의 웰링턴 전쟁기념관 건물 전경.

웰링턴 국립박물관의 갈리폴리 특별전시관

수도 웰링턴은 인구 40만 명에 불과하지만, 매일 오후 5시 언덕 위의 전쟁기념관에서는 전몰용사들을 추모하는 진혼곡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전쟁기념관 전시물 대부분은 제1차 세계대전 자료들이다. 1910년대 뉴질랜드 총인구는 100만 명 수준. 1914년 1차 대전이 발발하자 10만 명의 청장년들이 전쟁터로 나갔고 그 절반이 죽거나 불구가 됐다. 엄청난 전쟁 후유증을 겪었지만, 뉴질랜드는 이 전쟁을 계기로 비로소 국가 정체성을 확립했다.

특히 1915년 4월부터 터키 갈리폴리반도에서 뉴질랜드·호주·영국군과 터키군이 뒤엉켜 거의 1년 동안 치열하게 싸웠다. 쌍방 사상자는 무려 50만 명. 이 참혹했던 전쟁 역사는 웰링턴 국립박물관 ‘갈리폴리전투 전시관’에 상세하게 재현돼 있다. 거의 30분 이상 대기해야 전시관에 들어갈 정도로 관람객들이 붐빈다.

웰링턴 이민사박물관은 뉴질랜드 개척 역사를 잘 보여준다. 1800년대 대거 이주해온 영국·중국·인도인들의 생활상이 전시돼 있다. 또 1940년대 태평양전쟁 당시 이 항구에는 대규모의 미군들이 주둔했다. 자유분방하고 여유 있는 미군의 출현에 웰링턴의 젊은 여성들이 열광했다. 이방인 총각과 본토박이 처녀의 교제가 급격하게 늘어나자 현지 청년들은 분노했다. 수시로 미군과 현지인들 간에 주먹다짐이 벌어졌고, 양국 정부는 사건 해결에 골머리를 앓았다. 이런 전시자료는 본능적인 면에서 인간사회나 동물세계나 전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듯했다.

‘뉴질랜드 전쟁’ 당시 마오리족 방어 요새 전경.
‘뉴질랜드 전쟁’ 당시 마오리족 방어 요새 전경.


한국보다 불편한 뉴질랜드 철도 교통

웰링턴 답사 후 오클랜드행 기차표 예약을 위해 중앙역으로 갔다. 뉴질랜드 철도 교통은 한국보다 다소 낙후됐다. 하지만 열차 요금은 한국과 비교해 거의 3배 수준. 기차표를 받았지만, 좌석표는 탑승 전 다시 매표소에 와서 받아야만 한단다. 왜 이렇게 복잡한 절차를 거치는지 외국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역으로 나갔지만 매표 창구 앞에는 이미 승객들이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열차 출발 시간이 다가와 앞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창구로 급히 가려고 하니 “걱정하지 마라!”며 만류한다. 대부분 오클랜드로 가는 승객들이란다. 승강장의 열차는 외관상 낡아 보였지만, 객차 내부는 깨끗하고 쾌적했다. 한국의 고속열차를 상상했으나 남북 종단 열차는 무궁화급 속도로 느릿느릿 운행한다. 서울~부산 거리보다는 다소 멀었지만, 소요 시간은 무려 11시간. 시속 300㎞ 고속열차에 적응된 한국인 시각에서 보면 뉴질랜드 시간은 너무나 느리게 가고 있었다.



참전용사가 경험한 한국전쟁과 한강의 기적

창밖의 시원한 바다, 울창한 산림과 목장에 정신이 팔려 한동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앞자리의 노부부도 필자가 한국인임을 알고 반갑게 대한다. 그들의 한국 이미지는 단연코 ‘전쟁 폐허를 극복해 신화를 남긴 나라’였다. 그 부부의 친척인 윌리엄은 한국전쟁 당시 통신병으로 참전했단다. 그는 휴가 때마다 폐허가 된 서울을 떠나 항상 일본에서 시간을 보냈다. 1953년 한국 근무를 마치고 윌리엄이 부산항을 떠날 때 동료가 “이봐, 너무 섭섭해하지 마. 언젠가 휴가를 이 나라로 올 수도 있잖아”라고 하자 주변 군인들이 박장대소했단다. 그 누구도 산산이 부서지고 찢어지게 가난한 한국으로 다시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윌리엄은 2002년 한국 정부 초청으로 다시 서울을 찾았다. 높은 빌딩, 말끔한 거리, 생기발랄한 시민들을 보고 너무나 놀랐다. 특히 참전용사들의 가평 북중학교 장학금 전달 행사에서 어린 학생들의 진심 어린 감사 인사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후 열렬한 한국 팬이 된 윌리엄은 그토록 원했던 한국 재방문을 이루지 못하고 수년 전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사진=필자 제공<신종태 통일안보전략硏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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