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

전선의 장병들 “애국심 모욕 마라” 징병제 거부

입력 2019. 11. 26   16:10
업데이트 2019. 11. 26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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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주(상)


캔버라 전쟁기념관 한국전쟁 전시실
한국 자유 위한 호주인 헌신 깨달아
2차 세계대전 중에도 모병제 유지해
질서정연한 참전용사 추모행사 눈길
군사유적을 역사교육 현장으로 활용

 

호주의 수도 캔버라에 있는 국립전쟁기념관에서는 연중 크리스마스 단 하루를 제외하고 매일 참전용사 추모행사가 열린다. 사진은 추모행사에 참가한 초등학생들이 헌화하는 모습.  필자 제공
호주의 수도 캔버라에 있는 국립전쟁기념관에서는 연중 크리스마스 단 하루를 제외하고 매일 참전용사 추모행사가 열린다. 사진은 추모행사에 참가한 초등학생들이 헌화하는 모습. 필자 제공
캔버라의 왕립군사대학 창설기념비 앞에서 만난 장교후보생.  필자 제공
캔버라의 왕립군사대학 창설기념비 앞에서 만난 장교후보생. 필자 제공

지구 상에서 가장 안보위협이 없는 나라 호주! 세계 3대 미항 시드니를 포함해 수많은 관광명소와 풍부한 자연자원까지 가진 나라다. 국토 면적은 769만㎢로 한국의 78배지만, 인구는 2500만 명에 불과하다. 연 국민 개인소득 5만4000달러로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운, 정말 신이 축복한 국가다. 그러나 이 축복의 땅에 사는 호주인들이 숱한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피땀을 흘렸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현재 군사력은 현역 5만7800명(육군 2만9000, 해군 1만4400, 공군 1만4400), 예비군 2만1100명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1800여 명이 평화유지군으로 해외에 파병돼 있다. 또 호주 전국에는 유학생을 포함해 약 15만 명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다.


캔버라 전쟁기념관의 한국전쟁 전시실


1770년 1월 26일, 영국인 선장 쿡(Cook)이 최초로 이 대륙에 상륙한 후 많은 영국인이 이주해 왔다. 이들의 후손인 호주군은 국익을 위해 1800년대 말부터 수많은 전쟁에 참전했다. 최근에는 아프간·이라크전쟁에도 전투부대를 파병해 미·영과 혈맹관계를 과시했다.

수도 캔버라는 정부청사, 국회의사당, 왕립군사대학 등 국가 핵심기관이 모여 있는 인구 40만의 작은 행정도시다. 특히 국회 맞은편 국립전쟁기념관은 매일 수많은 관람객이 몰려든다. 전시관은 크게 보어전쟁, 제1·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아프간·이라크전쟁, PKO실로 구분돼 있다.

한국전쟁 전시실은 전쟁 발발·경과 및 호주-한국의 관계를 자세하게 설명한다. “1950년 6월 9일부터 23일까지 일본 주둔 호주군 스투아트 소령 일행은 한국으로 건너가 38선 상황을 면밀하게 확인한 후 ‘한국군은 공격작전이 불가하다’는 조사 결과를 유엔에 보고했다.

뒤이어 6월 25일, 북한군의 불법 남침이 시작되자 이 증거자료가 신속하게 유엔군을 한반도로 파병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라고 한다. 호주군 역시 연인원 1만7164명이 참전해 전사 340명, 부상 1216명, 포로 29명의 피해를 보았다.

전시관 자료를 보면서 한국의 자유를 위한 호주인들의 헌신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 전시실에는 1950년대 초토화된 서울 거리, 울부짖는 피란민, 불타는 초가집 등 많은 기록사진들이 있다. 이런 잿더미 속에서 오늘날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선 대한민국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호주인 상무 정신과 참전용사 추모행사

기념관 전시자료 중 ‘제2차 세계대전 중 병역제도 논란’은 퍽 인상적이었다. 전통적으로 모병제를 유지해온 호주는 전쟁이 장기화하자 자연스럽게 징병제 도입이 거론됐다. 의회에서 ‘모병제, 징병제’ 문제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자 뜻밖에 전선의 장병들이 “우리의 애국심을 모욕하지 마라! 강제 징집제는 절대 반대한다”라며 집단으로 항의했다. 결국, 호주는 전쟁 중에도 모병제를 계속 유지했다. 그 후 1960년대 베트남전 당시 일시적으로 징병제를 시행했지만, 전쟁이 끝나자마자 모병제로 다시 전환했다. 이 같은 호주인들의 독특한 애국심이 오늘날 호주를 부강한 국가로 만드는 데 밑거름이 된 것 같았다.

전쟁기념관이 문을 닫는 오후 5시! 은은한 진혼곡 나팔 소리와 함께 참전용사 추모행사가 시작된다. 특히 현장학습을 온 초·중등 학생들은 질서정연하게 행사장에 앉아 이 의식을 끝까지 지켜본다. 국가 연주-참전자 약력 소개-유가족·학생 헌화 순서의 20분 안팎 행사다. 사망한 참전자의 유가족·전우가 신청하면 누구나 추모 대상자로 선정된다. 연중 크리스마스 단 하루를 제외하고 이 행사는 매일 진행된다고 했다.


100년 전통의 호주 왕립군사대학

캔버라의 왕립군사대학은 울타리가 없으며 일반인 출입도 자유롭다. 호주군 장교 양성은 1년 과정의 군사대학과 3년 학제의 국방사관학교로 나뉜다. 군사대학은 대학 졸업자, 사관학교는 고교 졸업자 중 선발한다. 1911년 6월 27일 개교한 군사대학은 미국·영국 사관학교를 모델로 삼았다. 제1·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당시 호주 장교단 주축이었던 많은 졸업생이 전사했다.

100여 년 전통의 학교답게 대부분 건물이 고풍스럽다. 심지어 대연병장도 잔디밭이 아닌 콘크리트 바닥이다. 영내에서 만난 존은 시드니대학을 졸업하고 장교의 길을 택했는데, 후보생은 상병 계급을 부여받는다고 했다. 모병제인 호주군 이등병 연봉은 6만 호주달러(약 4800만 원) 수준이며, 아파트·의료 지원과 해외파병 시 상당한 수당이 추가된다. 넓은 학교 부지에 다양한 훈련시설을 갖추고 있으나 강의실과 후보생 숙소는 외관상 상당히 낡아 보였다. 하지만 교정 곳곳의 전사자 명비, 전쟁영웅 동상, 학교 연혁비 등에서 숱한 호국간성을 배출한 명문 군사학교의 빛나는 전통을 느낄 수 있었다.


누드해수욕장·전쟁유적 뒤섞인 시드니반도

호주 무역·상업의 중심지 시드니는 500만 인구를 가진 항구도시다. 수많은 관광객이 거리를 메우는 평화로운 이 도시 중심부 공원에 안자크전투 기념관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터키의 갈리폴리전투 전몰용사 현충시설이다. 포탄 조형물, 추모 호수, 전쟁영웅 비각은 시드니항의 평화로운 오페라하우스를 상상하는 우리에게는 의외로 느껴진다.

또한 시드니항에서 길쭉하게 뻗어 나간 3개의 반도 곳곳에는 널찍하고 쾌적한 시민공원과 누드해수욕장이 뒤섞여 있다. 공원 해변 언덕에는 포병훈련소, 제1·2차 세계대전 당시의 해안포·벙커·후송병원·잠수함감시초소가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하지만 언덕 아래 백사장에는 알몸의 남자들이 희희낙락하며 일광욕을 즐긴다. ‘선녀와 나무꾼’ 설화를 상상하며 누드해수욕장을 유심히 살피니 대부분 여성은 비키니 차림이다. 금강산 폭포 아래 벗어놓은 선녀 옷을 훔쳐갔다는 소문이 이미 이곳까지 퍼진 모양이다. 시드니반도의 과거 군사요새 일부는 현재도 해군조기경보부대들이 차지하고 있다.

‘해안포와 전투시설, 누드해수욕장, 조기경보부대…’ 이질적 요소가 뒤섞여 있지만, 호주인의 상무 정신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듯했다. 또한, 선조들의 피땀 어린 군사유적을 후손들의 역사교육 현장으로 활용하는 지혜가 부럽기만 했다.


<신종태 통일안보전략硏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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