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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임, 이 케첩에게 맡겨주세요

기사입력 2019. 11. 08   16:45 최종수정 2019. 11. 10   10:20

<2> 청년의 성과 사랑

성경험 청소년의 26%만 “피임”
“준비 못해서” 응답 가장 높아

 
눈치 보지 않고 피임 도구 구입하게
질병관리본부, 소스 모양 콘돔 제작

 
학교 근처 판매 등 다양한 판촉 활동
기성세대의 보수적 시선에 메시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청소년기에서 군 복무 시절까지가 남자의 성욕이 가장 왕성한 시기일 수 있다. 콘돔이 그만큼 더 절실하게 필요한 때일 수 있는데, 콘돔을 사려고 하면 왠지 눈치가 보인다. 2017년의 조사 결과, 우리나라 청소년의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와 에이즈(AIDS) 감염 신고자 수가 2000년에 비해 8.5배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험이 있는 청소년 응답자의 26.5%만이 ‘항상 피임을 한다’고 답했다. 놀라운 결과다. 왜 콘돔을 쓰지 않느냐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 사회는 청소년의 콘돔 구매에 너그럽지 않았다.


질병관리본부, 바른생각·아이디엇과 캠페인

청소년들은 사회의 부정적 인식으로 인해 성병 예방을 위한 콘돔 사용을 머뭇거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사정에 주목한 질병관리본부는 콘돔브랜드 바른생각, 광고회사 아이디엇과 함께 눈치 보지 않고 청소년들이 콘돔을 살 수 있도록 공동 캠페인을 기획했다. 커피믹스 봉지나 라면수프 봉지에 콘돔을 넣어 판매한다면 청소년들이 여기저기 두리번거리지 않고 콘돔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질병관리본부의 ‘시크릿 콘돔(secret condom)’ 캠페인(2019)은 이런 생각에서 시작됐다. 콘돔은 맞지만 콘돔처럼 보이지 않는 비밀 콘돔을 만들자는 것. 질병관리본부는 협력사와 함께 토마토 케첩, 허니 머스터드, 핫소스 형태인 ‘소스 3종 세트’ 콘돔을 비롯해 커피믹스, 핫초코, 아이스티로 구성된 ‘탕비 3종 세트’ 콘돔을 제작했다. 이 밖에도 녹차나 라면수프 봉지에 담긴 콘돔 등 여러 가지 콘돔 시리즈를 선보였다.


질병관리본부가 콘돔브랜드 바른생각, 광고회사 아이디엇과 함께 추진한 캠페인 영상.


“눈치 보지 마세요”

광고가 시작되면 이영은 아나운서가 등장해 마치 뉴스를 전달하듯 담담한 어조로 콘돔에 대해 설명한다. “토마토 케첩, 머스터드, 핫소스. 갑자기 웬 소스냐고요? 소스가 아니라 콘돔입니다. 실제 판매 중인 소스라고 해도 믿을 법한 이 자연스러움. 커피믹스나 핫초코 같은 모양도 있고 녹차나 라면수프처럼 디자인된 콘돔도 있대요. 시중 편의점에서 진짜 살 수 있고요.


그런데 콘돔에 왜 이런 디자인을 했냐? 청소년의 성관계 관련 통계를 보면 성관계를 경험한 청소년의 피임 실천율이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 이유로 ‘피임 도구를 준비하지 못해서’라는 응답이 가장 높았어요. 그래서 나온 해결책의 하나가 바로 이 시크릿 콘돔이죠. 청소년들이 콘돔을 살 때나 갖고 다닐 때 부정적인 시선을 받지 않도록 만든건데요. 피임 실천율을 높이기 위한 노력, 여러분은 어떻게 보시나요?”

질병관리본부는 시크릿 콘돔을 학교 근처 편의점에 전시하며 판촉 활동을 다양하게 전개했다. 청소년들이 콘돔을 사거나 소지할 때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지 않도록 해주는 이 캠페인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부끄러움과 거부감 같은 부정적인 인식이 해소됐다는 답변이 74%를 차지했다. 이런 반응을 바탕으로 시크릿 콘돔은 여러 곳에서 교육용 자료로 활용되며 부정적인 인식을 개선하는 캠페인을 이어가고 있다.

양의 창자에서 시작된 콘돔의 역사


사실 콘돔의 역사는 오래됐다. 최초의 콘돔은 영국왕 찰스 2세의 방탕함을 걱정하던 주치의가 혈통의 남용을 막기 위해 어린 양의 맹장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양의 창자로 만들었던 콘돔은 리넨을 거쳐 라텍스 소재로 진화했다. 최근에는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에서 에이즈 예방 운동 차원에서 콘돔 디자인을 공모했는데, 까만 나비넥타이 그림에 “품위 있게 착용하자”라는 카피를 쓴 작품이 최고상을 받았다. 가장 좋은 피임법은 하지 않는 것. 하지만 부득이 콘돔을 써야 한다면 좀 더 품위 있게 착용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정자당(丁子堂)의 삿구 광고(동아일보, 1926. 2. 26)


엄혹했던 일제강점기에도 사람들은 콘돔을 썼다. 정자당(丁子堂)의 삿구 광고를 보면(동아일보, 1926. 2. 26), “남녀 방독(防毒) 고무”라는 설명에 이어 ‘삿구’가 헤드라인으로 쓰였다. ‘삭구’로 쓰이다 일제강점기에 삿구로 굳어진 이 말은 요즘의 콘돔이다.


“본방(本邦, 우리나라) 유일(唯一)의 정량품(精良品, 정품)”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기능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상제(上製, 최고급품)부터 여자용까지 10가지 종류별로 값을 깨알같이 설명했다. 마지막에 가서야 “비밀히 개인 명의로 밀송(密送, 비밀 배송)함. 타품(他品)과 비교걸(比較乞, 비교 바람)”이라는 보디카피 두 줄을 덧붙였다. 콘돔을 독을 방지하는 고무라고 설명하고 있어 흥미롭다.


그 시절의 신문에 하루가 멀다 하고 매독과 임질 치료제 광고가 등장했으며 콘돔을 방독 고무로 설명했다는 사실에서, 당시에는 콘돔이 피임의 수단이 아닌 성병 예방 도구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마무리 카피에서 보듯이, 누가 알까봐 비밀리에 개인 앞으로 배송했다는 점도 요즘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가장 좋은 피임법은 하지 않는 것이지만 성욕이 왕성한 청소년 무렵이나 군복무 시절에 욕구를 억제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질병관리본부의 시크릿 콘돔 광고에서는 눈치 보지 말고 콘돔을 사라고 한다. 그동안 기성세대들은 청소년의 성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보수적인 잣대를 들이댔다. 자신들 역시 뜨겁고도 뜨거웠던 젊은 날을 지나쳐 왔으면서도 말이다.

만약 어르신들이 토마토 케첩, 머스터드, 핫소스 봉지만 대충 보고 집어와 집에서 뜯었을 때 그 안에서 콘돔이 나온다고 해서 소스라치게 놀라시면 안 될 것 같다. 분명 이 광고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 청소년의 성 문제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던 어른들에게 돌이켜 생각해보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제, 청소년의 성과 사랑의 문제에 더 너그러워지고 그들의 심리적 불편감 해소에 동참하는 것도 기성세대가 해야 할 몫의 하나다.

<김병희 서원대학교 /광고홍보학과 교수 /한국광고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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