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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병영칼럼] 순국선열의 날

기사입력 2019. 11. 06   15:47 최종수정 2019. 11. 06   15:50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덕수궁 정문에서 왼쪽으로 돌아서 가다 보면 작은 이정표 하나가 있다. 중명전이다.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잠시만 걸으면 잔디밭에 가르마를 탄 듯 매끈한 길 위에서 중명전을 마주할 수 있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을 겁박하고 외교권을 박탈한 이른바 ‘을사늑약’의 역사적 현장이다. 실질적으로 대한제국이 국제사회의 일원에서 제외되는 날이기도 하다.

고종은 힘들어했지만 무능했고, 대신들은 저항했지만 미약했다. 충정공 민영환은 자결로 국가의 치욕에 응답했다. 백범 김구의 『백범일지』에 나오는, 덕수궁 앞에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결사항전의 뜻을 목 놓아 울부짖었던 관리가 헤이그 특사의 주역이었던 이상설이었다.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교총장을 지냈던 예관(예觀) 신규식은 군인 신분으로 그 치욕을 감당할 수 없었던지 음독(飮毒) 자결을 시도했다. 다행히 생명은 건졌지만, 그 음독의 후유증으로 ‘흘겨본다’는 뜻을 가진 ‘예관’으로 호를 지었다. 이처럼 애국지사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방식으로 제국 일본의 만행에 저항했다.

하지만 제국 일본은 어떠한가.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촉발했으며, 제국 일본의 막강한 군사력은 동유럽의 거대 국가인 러시아도 패퇴시켰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 10만 명이 희생당했고, 이를 보상받기 위해서 지금의 중국 요동반도인 관동주를 획득했다.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만리장성의 기점인 산해관의 동쪽이라는 뜻의 관동주를 지키는 군대가 바로 관동군이다. 여순 지역 전투에서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낸 일본군 사령관 노기(乃木)는 귀국할 때 자신의 양손에 두 아들의 유골을 들고 있었다. 일본 근대역사에서 감동적인 장면으로 각인됐다.

어디 그뿐인가. 1905년 10월 일본 도쿄 히비야 공원의 폭동을 무마하기 위해 일본이 자랑하는(?)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를 한반도에 파견해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대한제국의 주권을 훼손했다.

광풍과 야만의 시대, 힘없는 대한제국의 운명을 거머쥔 제국 일본의 칼날과 대한제국 내부에서 자신들의 안위만을 생각했던 이른바 을사오적의 ‘매국적 작품’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을사늑약이었다.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에 대한 응징은 약관 스무 살의 이재명이 시도했다가 자신은 형장의 이슬로 순국했다.

또한, 미국인 외교고문으로 제국 일본의 대한제국 침탈을 옹호했던 스티븐슨에 대한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의거처럼 수많은 의거와 항쟁이 전개됐지만, 국운은 이미 기울어져 산소호흡기로 연명하던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1월 17일 이날을 순국선열의 날로 기념했으며, 광복 이후 52년이 지난 1997년 국가 주관으로 순국선열의 날로 지정해 해마다 이날의 의미를 소환하고 있다.

1905년 이래 수천만의 한국인들이 제국주의 시대에 희생당했던 과거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는 길은 후손에게 아름다운 문화를 향유하는 공간을 물려주기 위함이라는 노력이자 책무임을 기억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과 국가를 모두 포함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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