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건축, 전쟁사를 말하다

베를린 장벽 붕괴 30년…장벽의 교훈은 어디에

최승희

입력 2019. 11. 01   17:42
업데이트 2019. 11. 03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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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전쟁사를 말하다 <19> 독일의 베를린 장벽


자유 원하는 시민 힘으로 허물어진지 30년

세계 곳곳엔 또 다른 장벽이


현재 가장 길게 남아있는 베를린 장벽의 전경. 오스트반호프 역 부근의 1.3km 길이로 된 이스트사이드갤러리로 1990년 2월부터 9월까지 21개국에서 초청한 118명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로 구성돼 있다. 사진=픽사베이.
현재 가장 길게 남아있는 베를린 장벽의 전경. 오스트반호프 역 부근의 1.3km 길이로 된 이스트사이드갤러리로 1990년 2월부터 9월까지 21개국에서 초청한 118명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로 구성돼 있다. 사진=픽사베이.


올해 11월 9일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주년 되는 날이다. 독일 베를린 도심 한가운데를 갈랐던 베를린 장벽은 한국의 비무장지대(DMZ)와 더불어 냉전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연합국에 의해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으로 분단된 이후 동독 정부는 주민 탈출을 막기 위해 1961년 8월 13일 베를린 장벽을 세웠다.


그러나 통계에 따르면 베를린 장벽을 넘어 탈출한 동독인은 5000여 명에 이르고 장벽을 넘다 경비병에게 사살되거나 사고로 사망한 사람은 136명에 달한다. 네 차례에 걸쳐 증축이 이뤄진 베를린 장벽은 총 길이 155㎞에 달했고 동·서 베를린을 가로지른 벽은 43㎞였다.


이 장벽을 동독 정부는 ‘반파시즘 방어벽’이라고 불렀고 서독 정부는 ‘수치의 벽’이라고 표현했다. 1989년 11월 9일에 베를린 장벽은 허물어졌고 1년 뒤인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역사적인 통일을 이뤄냈다.


1961년 11월 19일 촬영된 브란덴부르크 문 인근의 베를린 장벽 모습. 
 사진=rarehistoricalphotos.com
1961년 11월 19일 촬영된 브란덴부르크 문 인근의 베를린 장벽 모습. 사진=rarehistoricalphotos.com


냉전 시대, 독일의 분단

‘냉전(冷戰·cold war)’은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대립 시기에 만들어진 용어다. 무기를 들고 싸운다는 의미의 전쟁인 ‘열전(熱戰·hot war)’과는 반대로 냉전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전쟁을 뜻한다.


1945년 5월 7일 독일이 2차 대전에서 항복한 이후 8월 2일 포츠담 협정을 통해 서베를린과 서독 지역에는 미국과 영국·프랑스군이, 동베를린과 동독 지역에는 소련군이 주둔했다. 그러나 소련과 서방 3국 간의 의견 대립으로 독일에 대한 공동 관리 기능이 점차 마비 상태에 빠진 가운데 1947년 마셜 플랜에 따라 서독에 대한 미국의 경제 지원 과정에서 서독의 새로운 화폐가 동독 경제를 크게 혼란케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에 소련은 1948년 3월 20일 독일관리이사회를 탈퇴해 서독 지역 통화개혁안과 베를린 적용안에 반발하고 6월 24일부터 서베를린을 봉쇄했다. 서방 3국은 이에 맞서 1949년 5월까지 서베를린 시민의 생활물자를 항공기로 수송하는 ‘베를린 대공수’ 작전을 실시했다. 서방 3국의 대공수가 계속되자 소련은 1949년 5월 12일 봉쇄를 해제했다. 무력 충돌은 없었지만, 대공수 작전 기간 미군 항공기 17대와 영국군 항공기 8대가 추락해 미군 조종사 31명, 영국군 조종사 39명이 사망했다. 베를린 봉쇄로 인한 갈등으로 서방 3국은 1949년 5월 23일 서독을 출범시켰고, 소련은 1949년 10월 7일 동독을 선언해 독일은 분단되고 말았다.


소련 흐루쇼프·동독 울브리히트 제안에 건설

동독 정권이 들어선 1949년부터 1961년까지 총 260만 명이 넘는 동독인이 서독으로 넘어갔다. 이는 정부가 경제개발을 약속했으나 경제적인 어려움이 더해가고 정치적 박해가 계속됐기 때문이다. 1953년 6월 수십 만의 시민들이 벌인 반정부 시위를 소련군이 탱크와 장갑차를 동원해 진압하면서 불만은 극에 달했다.

탈주는 베를린 지역에서 주로 이뤄졌다. 탈주자들이 동독 경제 발전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로 급증하자 소련과 동독이 이를 원천 봉쇄할 방안을 강구했다. 소련의 흐루쇼프가 동독의 사회통일당 제1서기 울브리히트에게 베를린 장벽을 제안했다. 1961년 8월 13일 새벽에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을 오가는 통행로가 브란덴부르크 문을 기점으로 동독 무장군인과 경찰에 의해 철조망으로 차단됐다. 8월 23일까지 동·서 베를린을 연결하는 80여 개의 통행로 중 73개가 폐쇄됐다. 경계선에는 점차 블록과 콘크리트로 만든 견고한 장벽이 세워졌다.

1962년 6월 이미 축조된 장벽에서 100m 이내 건물이 철거되고 ‘죽음의 지대(Death Strip)’로 불리던 무인 지대가 만들어졌다. 1965년에는 다시 콘크리트 벽이 세워지고 1975년에는 통일 때 붕괴된 형태의 장벽이 세워졌다. 장벽 바로 뒤편 동독 지역에는 60∼70m 폭의 무인지대가 설정돼 사전에 출입을 허락받은 이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베를린 장벽의 높이는 3.6m, 폭은 1.2m였다.


18살 페터 페히터 등 136명 장벽 넘다 희생


베를린 장벽 설치는 서독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충격을 줬다. 서방 3국은 소련에 공식 서한을 보내 장벽 설치가 베를린에 관한 4국 협정 위반이라고 항의했는데 그래도 다행히 군사 충돌은 피했다. 베를린을 동·서로 나누는 철조망이 설치된 지 3일 뒤인 1961년 8월 15일 당시 국경 경찰이었던 콘라트 슈만이 근무 중 철조망을 넘으며 최초의 탈출자로 기록됐다.


이후 5000여 명이 베를린 장벽을 넘는 데 성공했지만, 베를린 장벽기념관과 시대사연구센터의 공동 연구 프로젝트에 따르면 136명이 이 장벽을 넘다 희생됐다고 한다. 18살의 페터 페히터는 1962년 8월 17일 탈출을 시도하다가 동독 병사의 총에 맞고 쓰러져서 어느 쪽으로부터도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철조망 아래서 피를 흘리다 사망했다. 마지막 희생자인 크리스 귀프로이는 21살의 나이로 1989년 2월 6일 총에 맞아 사망했다.


1989년 11월 9일부터 무너진 베를린 장벽

1987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개혁개방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를 표명하고 소련 위성국에 대한 개입·간섭 정책이었던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했다. 이로써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서 민주화와 자유를 향한 열기가 일었고 동독에도 영향을 줬다. 1989년 당시 동독에는 소련군이 약 40만 명 주둔하고 있었으며 동독 정규군도 약 17만 명이나 됐다. 소련군은 이미 1953년 베를린 봉기와 1968년 체코 자유화 운동 등을 무력으로 진압한 적이 있기에 동독의 개혁세력과 시민들은 무력진압을 우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가 시위대 진압을 위한 동독 정부의 소련군 지원 요청을 거부하면서 유혈진압은 없었고 오히려 동독 군대와 공산당 조직은 통일 과정에서 저항도 없이 온전히 해체됐다.


1989년 11월 동독의 학생들이 브란덴부르크 문에 있는 베를린 장벽에 앉아 있는 모습.  
 사진=radio.wosu.org
1989년 11월 동독의 학생들이 브란덴부르크 문에 있는 베를린 장벽에 앉아 있는 모습. 사진=radio.wosu.org


1989년 11월 9일 동독 공산당 공보비서 귄터 샤보브스키가 ‘모든 국경과 베를린 장벽의 개방을 포함한 여행자유화 계획’에 관한 기자회견 때 “이 법률이 언제부터 발효되느냐”라는 이탈리아의 페터 브링크만 기자의 질문에 “즉시 시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대답한 생방송을 지켜본 수많은 동독인들이 동·서독 경계선의 국경통과소로 몰려들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장벽 전체가 철거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동독 정부가 공식적으로 장벽 철거를 시작한 것은 다음 해인 1990년 6월 13일이었다. 역사의 기념물로 남기기로 결정한 약간의 구간과 감시탑을 제외한 모든 시설은 1991년 11월까지 철거됐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공산체제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1989년 여름 이래 폴란드를 필두로 헝가리·체코 등 동유럽 각국에서 민주혁명이 일어나서 공산정권들이 몰락했으며 소련 연방은 1991년 12월 8일 해체됐다. 동독인들이 자유를 찾아 넘으려 했던 베를린 장벽은 1990년 2월부터 9월까지 21개국에서 초청한 118명의 화가들이 오스트반호프 역 부근 1.3㎞의 장벽에 그린 그림들로 구성된 이스트사이드갤러리를 비롯해 장벽박물관, 베를린장벽기념관 등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세계 곳곳에서는 지금도 장벽이 세워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등 주변국들의 침입을 차단하기 위한 장벽을 만들고 있고, 2017년 트럼프 대통령 집권 이후 강력한 반이민 정책을 추진하는 미국은 현재 이민자를 막기 위해 장벽을 쌓고 있다. 베를린 장벽의 교훈은 통하지 않는 걸까?

필자 =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최승희 기자 < lovelyhere@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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