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기하학적 추상예술 그룹…디자인·건축에 큰 영향

입력 2019. 10. 16   17:12
업데이트 2019. 10. 16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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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데 스틸과 신조형주의 - 신지학, 신플라톤주의, 형체해체론, 바우하우스, 다다이즘, 원과 사각형 운동


몬드리안, 구성 A, 1920, 유화, 90x91㎝, 로마근현대미술관.
몬드리안, 구성 A, 1920, 유화, 90x91㎝, 로마근현대미술관.
1917년 10월 되스부르크에 의해 출간된 『데 스틸』 제1호 표지. 디자인은 빌모스 휘사르가 맡았다.
1917년 10월 되스부르크에 의해 출간된 『데 스틸』 제1호 표지. 디자인은 빌모스 휘사르가 맡았다.
카페 라베트(Cafe L Aubette, Strasbourg)의 내부. 되스부르크의 ‘원소주의’ 스타일로 인테리어를 해 건축과 미술이 완전하게 통합된 예로 꼽힌다.
카페 라베트(Cafe L Aubette, Strasbourg)의 내부. 되스부르크의 ‘원소주의’ 스타일로 인테리어를 해 건축과 미술이 완전하게 통합된 예로 꼽힌다.
되스부르크, 시간과 공간의 구축 II, 1924, 트레이싱 종이에 과슈 연필 잉크, 47x40.5㎝, 티센미술관.
되스부르크, 시간과 공간의 구축 II, 1924, 트레이싱 종이에 과슈 연필 잉크, 47x40.5㎝, 티센미술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드러난 인간의 잔인함과 이로 인한 참상을 극복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자는 여망과 노력이 나타났다. 영어의 스타일(Style)에 해당하는 네덜란드어 ‘데 스틸(De Stijl)’ 운동도 그런 노력의 하나다. 데 스틸 운동에 동참한 이들은 예술 관람으로 사회적·정신적인 구원을 통해 새로운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졌다. 하지만 이것이 실현될 수 없는 ‘환상’임을 자각하면서 데 스틸 운동은 종말을 맞는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과 시도는 모더니즘의 바탕이 되는 동시에 미술의 전통과 방법론을 일신하는 계기가 됐고, 건축과 디자인 등 삶에 바탕을 둔 미술을 실천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데 스틸 운동이 시작된 1917년 네덜란드는 정치·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경험했다. 사회분열의 원인이었던 구교와 신교 간의 종교적 앙금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기독교 보수주의 세력 간의 타협(Pacificatie van 1917)으로 일부 해소됐다. 또 선거권이 보편적으로 인정되면서 혁명적인 의회정치를 통해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오늘날 자유와 민주를 대표하는 ‘개방과 관용의 나라’ 네덜란드가 탄생한 것이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은 예술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군의 미술인들은 ‘미래의 새로운 사회를 어떻게 형성해 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중립을 유지했던 네덜란드의 예술가들은 1914년 이후 네덜란드를 떠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당시 국제적인 미술의 중심인 파리와는 동떨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적인 변화의 요구를 감지한 화가 되스부르크(Theo van Doesburg,1883~1931)는 『데 스틸』이란 잡지를 창간하고 새로운 미술 운동을 펼치기 위해 다른 예술가들을 찾아 나섰다.

되스부르크를 중심으로 더 나은 희망이 있는 미래, 진보와 긍정, 재미에 대한 믿음 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뭉쳤다. 여기에 적극 동참한 화가로는 몬드리안(Piet Mondrian,1872~1944)이 있다. 그는 신지학(Theosophy)과 데 스틸의 조형적 이념과 철학적 배경을 공식화한 쇤매커(M.H.J. Schoenmaekers,1875~1944)의 신플라톤주의에 기반한 미술이론을 펼치면서 신조형주의(Neoplasticism)를 펼쳐나갔다.

몬드리안은 칸딘스키가 주창한 ‘반(反)자연의 재현’에 착안해 고흐와 고갱의 색채와 공간에서 추상성, 세잔의 사물의 구축적 표현, 확대된 입체파에 보이는 조형적 표현의 가능성 등을 접목시킨 완전한 추상을 시도했다. 그는 입체주의의 형체해체론을 더욱 발전시켜 대상의 구조적 파악을 통해 기하학적인 선과 단순한 색채의 순수한 관계를 보여주는 극단적 추상론을 전개했다.

금욕적이고 절제됐으며 심각한 면모를 지닌 신조형주의의 기본 이념 역시 새로운 조형성의 탐구를 지향했다. 구체적인 형태를 재현하기보다는 형태의 원초적이며 보편적 관계, 즉 ‘수직, 수평의 비대칭적 관계’만을 끝까지 고집하며 순수를 지향했다. 특히 되스부르크는 『데 스틸』이라는 잡지에서 유토피아적 이상에 기초한 정신적 조화를 추구하는 넓은 의미의 예술 개념을 채택하고, 이를 동조하는 예술가들을 규합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이렇게 그는 몬드리안과 건축가 제이콥 오우트(JJP Oud,1890~1963), 빌모스 휘사르(Vilmos Huszar,1884~1960) 등 건축가와 화가들을 모아 데 스틸 운동을 펼쳤다.

데 스틸 운동은 시각예술을 넘어 다양한 예술적 장르를 포함하는 종합예술을 지향해 건축, 도시계획, 산업디자인, 타이포그래피, 음악과 시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미학을 숙성시켜 나갔다. 이들이 생각했던 예술은 인간의 삶에 유용한 예술이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대두된 실업, 노숙자,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등의 사회문제와 새로운 경제 시스템은 건축가, 작가, 화가, 디자이너에게 큰 고민을 안겼다. 이들은 산업화 이후의 건축재인 유리, 콘크리트와 철재를 사용해 노숙자와 빈곤한 이들을 위한 주택 개발 등의 새롭고 긴급한 아이디어들을 구했다. 따라서 이들은 새로운 도시주의를 반영한 도시 계획과 유토피아를 구현하려는 아이디어에 몰두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황폐화한 세계에 새로운 질서와 조화를 부여하고 표현하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추상미술을 지향한 이들뿐만 아니라 칸딘스키나 말레비치, 한스 아르프(Hans Arp,1886~1966)도 그즈음 추상미술에 몰두하고 있었다. 하지만 몬드리안이나 되스부르크, 일리야 볼로토프스키(Ilya Bolotowsky,1907~1981)와 같은 데 스틸 화가들은 리트펠트(Gerrit Rietveld,1888~1964), 오우트 등 건축가들과 함께 직선과 사각형, 삼각형, 원 등을 기본으로 이들로 구성된 순수한 형상을 표현했다. 대부분의 도형들은 기본적인 삼원색으로 칠해졌으며, 대칭보다는 비례와 균형, 순수한 색의 대비를 통해 화면의 균형을 찾으려 했다.

‘예술은 미적 정제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인간의 마음을 순수하게 표현하는 방법은 추상적인 형태로 말을 하는 것’이라 생각해 ‘자연스럽거나 구체적인 표현’을 위한 신조형주의 이념을 추구했던 몬드리안은 데 스틸 운동과 같지만 또 다른 신조형주의(Neo Plasticism)를 전개했다. 신조형주의에는 판 데어 렉(Bart Van der Leck,1876~1958), 반통겔루(Georges Vantongerloo,1886~1965), 건축가 아우트 판 토프(Robert van t’Hoff,1887~1979), 윌스(Jan Wils,1891~1972) 등이 함께했다. 이들은 색채와 선의 순수한 관계를 주장하면서 그 순수성을 보편성과 연계해 회화, 조각, 디자인, 건축 등을 같은 원리로 통일시키고자 했다.

특히 몬드리안은 지금까지의 미술, 건축, 디자인과 구분하고 차별화하기 위해 1920년 ‘신조형(Nieuwe Beelding)’이란 명칭을 사용했고, 1925년 『신조형(Neue Gestaltung)』이란 책도 발간했다.

데 스틸 운동은 미술에서 형태와 색상, 가장 기본적인 선, 기본적인 원색만 사용하는 엄격한 규칙을 지켜야 했다. 예를 들어 데 스틸 운동은 수직과 수평선만 사용해야 했지만 되스부르크는 수직과 수평선이 만들어내는 회화에 부족한 역동성을 부여하기 위해 대각선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구성의 기울기를 허용하는 ‘원소주의(Elementarism,1924~1931)’를 주장했다. 이런 이유로 몬드리안은 데 스틸 운동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신조형주의와 바우하우스(Bauhaus), 구성주의, 다다이즘(Dadaism) 예술가들과 교류하던 모흘리 나기(Laszlo Moholy Nagy,1895~1946)와 아우트 등이 1927년 창간한 잡지 『110』이 이들을 잇는 교량 역할을 하면서 이들은 1930년대 초까지 꾸준하게 회화와 조각, 디자인, 건축에 많은 영향을 끼치며 20세기 추상미술운동의 중심을 이뤘다. 이후 신조형주의는 1930년 프랑스의 ‘원과 사각형(Cercle et Carre)’운동과 함께 미국으로 이식됐으며 1940년 몬드리안의 미국 방문 후 미국에서도 많은 예술가들이 이 이념에 동참했다.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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