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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관행 기고] 전쟁고아의 아버지 딘 헤스 대령을 추모하며

입력 2019. 10. 14   16:42
업데이트 2019. 10. 14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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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관행 공군사관학교 도서관장·군무서기관
조관행 공군사관학교 도서관장·군무서기관

지난 10월 1일은 공군 창군 70주년이었다. 군인으로서 몸과 마음을 바쳤던 수많은 순국선열이 있었기에 맞이할 수 있었던 뜻깊은 날, 공군박물관 입구에 전시된 대한민국 공군 최초의 전투기 F-51D(항공기 번호 18)를 바라보며 한 사람을 떠올렸다. 바로 딘 헤스 대령이다. 전시된 전투기에는 그의 좌우명인 ‘信念의 鳥人(신념의 조인)’이 선명하게 적혀 있다.

헤스 대령은 6·25전쟁 당시 한국 공군의 F-51 전투기 조종사를 양성했던 미 공군 교육부대 바우트 원(Bout One)의 지휘관(당시 계급 소령)이며, 1000여 명의 전쟁고아를 구한 전쟁영웅이다. F-51 전투기를 볼 때마다 “배우고 익혀서 몸과 마음을 조국과 하늘에 바친다”는 공군사관학교의 교훈을 가슴에 새기며, 헤스 대령의 헌신과 희생을 기억하게 된다.

목사가 되고자 했던 헤스는 신학대학 졸업 후 1941년 6월 목사안수를 받았다. 같은 해 헤스는 12월 7일 예배를 인도한 후 일본의 진주만 공격 소식을 듣고, 조국이 공격당한 상황에서 모든 것이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군목으로 군 복무를 지원한 상태였으나 일반 전투원으로 전선에 나갈 것을 선언했다.

1950년 4월부터 일본에서 근무하던 중 헤스는 6월 25일에 북한의 침략을 알게 됐다. 그는 “전보다 훨씬 전투에 숙달된 내가, 조국을 위해 그리고 온 인류를 위해 이 전투에 투신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어도 되는가?”라고 자문했다. 그는 한국에 공군 소령을 파견하는 계획을 접하고 지원해 선발됐다. 미 극동공군은 한국 공군에 F-51 10대를 제공해 헤스에게 한국 공군의 훈련을 담당케 했다. 1년 이내 10명의 미군 교관 조종사 중 7명이 전사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그는 250회의 전투출격을 수행했다.

1951년 1·4후퇴 때 헤스는 수송기로 전쟁고아 1000여 명을 김포에서 제주도로 후송시켰다. 헤스는 수십 번의 전화 연락과 무선교신으로 고아들을 수송할 상륙함(LST) 준비에 애썼으나 결국 수송선은 인천으로 오지 않았다. 추운 날씨 속에서 기다리는 동안 아이들 가운데 허약한 7명은 부둣가 등에서 안타깝게도 사망했다. 그는 수송기 동원을 위해 미5공군사령부에 청원했다. 기적적으로 미5공군에서 보낸 15대의 C-54 수송기가 김포 상공에서 착륙을 위해 선회하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어린이가 항공기 안으로 걸어 들어가 문이 닫히는 상황을 보며 “내가 느꼈던 그 지극한 감사와 안도감은 내 평생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헤스 대령은 바우트 원 부대의 지휘관으로 F-51D 비행교육을 통해 한국 공군의 전투능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6·25전쟁에서 보여준 그의 희생과 헌신은 우리의 가슴속에 계속 깊은 울림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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