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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볼셰비키 혁명’ 발단… 사회주의 시각 반영

기사입력 2019. 10. 08   16:51 최종수정 2019. 10. 09   13:27

34 러시아 아방가르드-신원시주의, 광선주의, 입체 미래주의, 절대주의, 구성주의, 콜라주, 포토몽타주, 다이아몬드 악당, 당나귀 꼬리, 생산자 미술 
 
유럽서 복귀한 작가들 가세로 촉발
학문·예술 등 급격한 변화 불러
무→유 창조 ‘비정형적 추상’ 주력 
 
‘사회주의 이념의 바벨탑’이라는
‘타틀린 타워’가 구성주의 대표작 

 
회화·조각은 부르주아 미술 간주
건축·무대미술 등으로 범주 넓혀
스탈린 개입으로 ‘쇠락의 길’로


타틀린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를 위한 디자인’.
칸딘스키의 ‘무제’.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인류 역사는 20세기를 맞으면서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정치는 물론 경제·과학·사회·문화의 급진적 혁신은 삶에 대한 생각과 태도까지 변화시켰다.

그래서 어떤 이는 20세기를 일러 “의욕을 불러일으키면서도 때로는 무시무시한, 하지만 항상 매혹적인 그런 세기였다”고 회고했다.

20세기를 격동의 세기로 이끈 것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국의 해체, 그리고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지상군을 거느렸던 러시아 제국의 ‘개혁보다는 혁명이 필요’한 상황에서 레닌을 주축으로 한 다수파 볼셰비키들은 1917년 역사적인 10월 혁명을 성공시켜 부르주아적인 전제 정부를 몰아내고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했다. 이는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혁명인 동시에 피지배 계급이 지배 계급을 타파한 최초의 혁명이었다.

이런 혁명은 사회뿐만 아니라 교육·학문·예술 등 많은 분야에서 급격한 변화를 불러왔다. 특히 미술 분야의 변화는 러시아 제국과 소련 사이, 즉 1890~1930년에 절대주의(Suprematism), 구성주의(Constructivism), 러시아 미래주의(Russian Futurism), 광선주의(Rayonnism), 입체적 미래파(Cubo-Futurism), 러시아 포멀리즘(Russian Formalism), 신원시주의(Neo-primitivism) 등으로 나타났다. 이를 통칭해 러시아 아방가르드(Russian avant garde)라 한다.

이 중심에 섰던 화가들은 주로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출신이 주를 이뤘다. 말레비치(1878~1935), 엑스터(1882~1949), 타틀린(1885~1553), 칸딘스키(1866~1944), 불뤼크(1882~1967), 아키펜코(1887~ 1964) 등이다.

물론 이전부터 추상미술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1차 대전으로 유럽에 나가 활동했던 작가들이 고국으로 돌아오면서 촉발됐다. 특히 칸딘스키는 10월 혁명 이후 1920년 3월 모스크바에 세워진 새로운 소비에트의 미술교육기관 ‘잉크유케이(INKhUK·Institute of Artistic Culture)’의 설립과 프로그램을 편성을 맡았다. 그는 이곳에서 인간의 지각과 심리에 영향을 미치는 예술형태 및 회화·조각·음악·시·건축·무용 등이 어우러진 종합예술 연구 프로그램을 실행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비정형적 추상은 사회적 혁명에 버금가는 미술의 혁명을 실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새로운 권력이 된 볼셰비키들은 미술 역시 완전히 무에서 새로 출발하기를 원했으며 부르주아 문화를 뛰어넘는 사회주의 문화를 만들려는 시도가 더욱 실험적이면서 구체적인 변화를 요구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대표 작가 말레비치의 기하학적 추상이다. 그는 궁극적으로 예술이 주제를 초월해야 한다고 믿었고, 형태나 색의 진실이 이미지나 서사보다 ‘최고’로 다뤄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절대주의’란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대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그 자체가 대상이 되는 추상적인 미술을 택했다. 이런 실험은 1910년 결성된 ‘다이아몬드 악당(Jack of Diamonds)’ 그룹의 가장 급진적인 멤버들로 구성된 ‘당나귀 꼬리(Donkey’s Tail)’ 멤버들이 1912년 전시를 열면서 본격화했다.

그 후 1915년 말레비치 등 13명의 작가가 마지막으로 개최한 ‘마지막 미래 미술 전시회’가 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리면서 하나의 유파로 자리 잡았다. 이때 출품된 그의 ‘검은 사각형’이나 시인 마야콥스키(1893~1930)의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는 정말 기존 예술들이 정신이 번쩍 나도록 따귀를 때렸다.

말레비치와 함께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이끈 한 사람은 타틀린(1885~1953)이다. 그는 ‘구성주의’의 아버지로 추앙받는다. 말레비치와 입체적 미래파 운동을 함께 하던 그는 1913년 파리 방문 이후 근본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기존의 오브제나 물체를 새롭게 구성하는 3차원적인 건축적 작업을 탐색한다. 1921년 타틀린은 모스크바에서 개최되는 코민테른 즉 제3인터내셔널 공산주의 회의에 헌정할 기념비를 의뢰받았다.

그는 이에 사회주의 이념의 바벨탑이라는 ‘타틀린 타워’, 즉 ‘제3인터내셔널을 위한 기념비’를 통해 사회주의 이념을 구현한 현대적이며 기능적이고 역동적인 정부청사 건물을 제안한다. 타틀린의 이 타워는 총 400m 높이에 유리와 철을 사용하고 중앙에 유리로 된 원통형·피라미드·입방체가 서로 다른 속도로 회전하도록 구상했다. 이런 그의 구상은 실은 러시아혁명 이후 사회주의가 미술을 대하는 입장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초기 아방가르드의 주역 중 하나였던 타틀린은 10월 혁명을 수용해 “내 온몸은 창조적이며 사회적이고 교훈적인 생활에 젖어들었다”고 말했다. 미술은 이제 순수한 미보다는 산업과 생산, 인민의 삶에 봉사하는 미술, 디자인이 중요하게 취급됐다.

이렇게 혁명정부는 회화와 조각을 부르주아 미술로 간주해 부정하면서 철과 유리 등 공업재와 그 생산물을 사용하는 미술의 사회적 효용성을 강조해 건축·디자인·무대미술 등으로 범주가 넓어졌다. 타틀린 타워도 이런 변화의 산물이다. 따라서 아방가르드 작가 중 혁명정부의 미술정책에 봉사하는 실용파와 순수조형파로 분리된다.

실용파는 알렉세이 간(1893~1942)의 ‘구성주의 선언’(1922)에 바탕을 둔 미술의 산업과 일체화를 실천에 옮긴 생산자 미술(Productivist art)을 주창했다. 이에 로드첸코(1891~1956)와 그의 아내 스테파노(1894~1958) 등이 합세해 “예술가도 노동자이며, 새로운 것들을 디자인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순수미술을 포기하고 그래픽 디자인, 사진, 포스터, 정치적 선전물에 전념했고 실용적이며 인민의 삶에 기여하는 디자인에 몰두했다. 이들은 콜라주(Collage)와 포토몽타주(Photomontage) 작업과 사진을 통해 구성주의 디자인을 완성한다.

한편 1919년경부터 이들과 결별하고 추상적인 공간과 리듬의 탐구를 추구했던 나움 가보(1890~1977)와 그의 형 페브스너(1886~1962) 등은 여전히 순수조형을 추구했다. 아방가르드 작가들은 삶과 예술을 일치시켜 사회주의 이념을 실천하고자 했지만 1939년 형식주의·극좌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이들을 대체하며 소멸한다.

아방가르드 예술에 동의하진 않았지만, 억압하지도 않았던 레닌과 달리 이후 등장한 스탈린은 예술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사회주의 혁명의 도구로 민중이 수용할 수 있는 작품을 중시했다. 이렇게 스탈린주의와 불화를 빚기 시작해 1934년 소비에트작가동맹 제1차 대회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창작 원칙으로 선포되면서 아방가르드 예술은 사라지고 전후 미국 미술에 많은 족적을 남긴다.

<정준모 큐레이터>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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