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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운석 병영칼럼] 가을이 아름다운 이유

기사입력 2019. 10. 04   15:59 최종수정 2019. 10. 04   16:33

임 운 석 빛바라 대표·여행작가


마트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다. 유통기한이 임박한 농산품을 따로 모아놓고 파는 식품코너인데, 거기에 놓인 상품에는 정가보다 저렴한 가격표를 붙여 놓았다. 지금은 비록 퇴물 취급받는 신세지만 그것들 역시 누군가 애지중지, 노심초사 기른 농작물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짠하다.

올봄, 화단을 가꿀 기회가 있었다. 두 평 남짓한 화단을 가꾸기 위해 배양토를 사다가 흙을 갈아엎고 씨앗을 뿌렸다. 그날 이후부터 수시로 화단을 들여다봤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났지만 화단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씨앗이 안 좋은 건가? 흙이 좋지 않나? 물이 부족한가? 등 시간이 갈수록 의구심만 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좁쌀만 한 떡잎이 고개를 내밀었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씨앗을 졸졸졸 흩뿌렸는데 그 자리를 따라 싹이 소복이 돋았다. 그 작은 떡잎들이 위대하고 숭고하게까지 보였다. 그렇게 싹을 틔운 녀석들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랐다.

두어 달이 더 지났다. 아직 꽃을 피울 시기가 아닌지 멀대처럼 키만 키웠다. 얼마 전까진 싹 틔우기를 학수고대하더니 어느 틈엔가 꽃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매일 화단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나를 보고, 이웃 사람이 한마디 했다. “지켜보고 있다고 꽃이 피는 게 아니에요. 때가 돼야 피는 거지.” 그 말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화단을 가꾸는 내 모습은 학처럼 머리를 빼고 안타깝게 기다리는 ‘학수고대’ 그 자체였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꽃망울이 생기더니 꽃잎까지 보였다. 쾌재를 불렀다. 그로부터 또 1주일을 보냈다. 드디어 화단엔 온통 꽃 잔치가 벌어졌다. 여기저기 팡팡 터지는 꽃들을 보는 게 기뻤고 행복했다. 오죽하면 화단 앞에서 히죽히죽 웃기까지 했을까.

복병도 있었다. 장맛비와 태풍이다. 빗물이 꽃잎에 직접 떨어지면 꽃잎이 빨리 시들기 때문에 화단에 비 가림막을 쳤고, 또 가물면 물주기에 바빴다. 기껏해야 작은 화단을 가꾼 게 전부지만, 농부의 마음을 십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농사와 농부의 마음을 거론한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지만.

노랗게 물든 들녘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부른 이가 있다. 사랑과 정성을 쏟아본 이는 그의 마음을 헤아릴 것이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노심초사하던 그는 농부다. 네가 목마르면 그도 목이 탔고, 뙤약볕에 논밭이 쩍쩍 갈라지면 그의 마음도 헛헛하게 갈라졌으며, 네가 영글면 그의 마음도 풍성히 영글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그는 농작물과 24시간을 함께 했으며 일심동체였다.

수확이 한창인 요즘 햇볕이 유난히 찬연한 것은 농부의 정성과 사랑을 하늘도 알기 때문이 아닐까. 한유(閑裕)한 가을 들녘에서 그가 거둬들이는 것은 농작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 가을이 아름다운 것은 단풍의 곱디고운 빛깔 때문이 아니다. 파종부터 수확하는 날까지 농부가 흘린 땀이 들녘을 물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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