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 병영칼럼

[박성진 병영칼럼] 멧돼지 수난시대

기사입력 2019. 10. 02   16:11 최종수정 2019. 10. 02   16:15

박성진 경향신문 부국장·안보전문기자


멧돼지 수난시대다.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의 전파 경로로 의심받는 탓이다. 군은 멧돼지가 비무장지대(DMZ)를 뚫고 남쪽으로 내려올까 봐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고 있다. 혹시라도 아프리카돼지열병에 죽은 북한 야생 멧돼지 사체가 하천을 따라 떠내려올지 모를 사태에 대비한 경계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아직은 멧돼지가 일반전초(GOP) 선상으로 진입을 시도하거나 우리 군이 DMZ 내에서 야생 멧돼지를 사살한 사례는 없다.

사실 GOP 철책은 북한 야생 멧돼지가 넘어올 수 없는 구조물이다. 그러나 최근 잇따라 상륙한 태풍에 수위가 높아진 임진강을 비롯한 접경지역 하천을 통해 멧돼지가 헤엄쳐 오거나 배설물이 떠내려왔을 가능성도 있어 긴장을 풀긴 어렵다. 민간에서는 멧돼지의 후각을 자극해 불쾌감을 주는 멧돼지 기피제까지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DMZ에서 멧돼지를 비롯한 야생동물들은 언제부터인지 ‘기피 동물’이 됐다. 스마트 철책의 ‘적’이기 때문이다. 스마트 철책은 철조망에 광그물을 씌운 감시·감지·통제 시스템이다. 감시카메라와 열상감시장비(TOD)까지 더해지면 낮엔 1~2㎞, 야간엔 200~400m 경계가 가능한 시스템으로, 광그물망에 침입 움직임이 감지되면 신호가 울리고 카메라가 촬영해 영상을 지휘통제실과 소초로 보내는 방식이다.

그러나 광그물망은 짐승을 따로 구분하지 못해 감지되면 경계음이 울리고 통제실이 파악해 5분대기조를 보내야 한다. 그러다 보니 경계를 신경 써야 하는 병사들에게는 너구리와 토끼가 기피 동물이 됐다. 광그물망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철책 아래쪽에는 동물들이 싫어하는 성분을 담은 봉지나 통들을 달아놓고 있다. 철책을 넘으려는 고라니도 골칫거리다.

과거 GOP 부대에서 멧돼지에게 잔반을 주던 모습도 사라진 지 오래다. 멧돼지의 철책선 접근을 막기 위해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4일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비무장지대(DMZ)를 국제평화지대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비무장지대 지뢰제거 작업에 유엔 기구 등 국제사회의 동참도 요청했다. 판문점과 북측 개성을 잇는 DMZ를 국제평화지대로 만들자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화되면 DMZ는 남북·국제사회가 함께 한반도 번영을 설계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 사실 DMZ의 평화지대화는 지난해 4·27 남북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서명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에 담겨 있어 새로운 것도 아니다. 문 대통령은 연설에서 남북 간 평화가 구축되면 북한과 공동으로 DMZ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도 추진하겠다고 했다.

현재 DMZ에는 약 38만 발의 대인지뢰가 매설돼 있다. 지뢰가 사라지면 멧돼지와 고라니 등 야생동물의 희생도 많이 줄어들 것이다. DMZ 철책이 사라지고 야생동물들이 자유로이 남북을 오가는 날을 기대해 본다. 그때쯤이면 남북이 서로 협력하는 방역작업으로 아프리카돼지열병도 이미 사라졌으리라.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에 대한 의견 개 있습니다. 로그인 후에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