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전쟁과 미디어

언론의 독립 취재·탐사 보도 계기 된 ‘베트남 전쟁’

입력 2019. 10. 01   14:53
업데이트 2019. 10. 01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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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미디어 <7>베트남 전쟁과 언론(중)


1968년 뗏 대공세 이후 전쟁 기사와 영상들, 미국 정치 뒤흔들어
대학가, 반전 시위 잇따라… 참전 용사들 휠체어 타고 동참 힘 보태
민주당 대선 후보 확정 전당대회서 반전 운동 지지자 낙선 ‘후폭풍’
공화당 닉슨 당선… ‘침묵하는 다수’ 이름으로 전쟁 철수 뜻 밝혀


1969년 7월 남부 베트남의 미군부대를 방문한 닉슨 대통령이 장병들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미 국립문서보관소(NARA)
1969년 7월 남부 베트남의 미군부대를 방문한 닉슨 대통령이 장병들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미 국립문서보관소(NARA)


미국 내에 반전 여론이 비등하는 계기가 된 뗏 대공세 보도는 언론이 기자회견이나 보도자료 같은 공식적인 정보원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된 취재와 분석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공세 이전 전투는 도시 외곽에서 벌어졌고, 많은 기자나 카메라맨들은 전투현장에서 멀리 있었다.


그러나 도심에서 벌어진 뗏 대공세는 기자들이 현장을 생생하게 보도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했다. 질서정연하고 피 묻지 않은 장면에 익숙했던 시청자들에게 편집되지 않은 채로 위성을 타고 날아온 혼돈과 파괴의 영상은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베트남 전쟁은 더 이상 승리하는 전쟁이 아니라 패배하거나 적어도 교착 상태에 빠진 전쟁이었다.

1968년 뗏 대공세 이후 베트남 전쟁 기사와 영상들은 미국 정치를 흔들어 놓았다. 대학가에서는 반전 시위가 이어졌다. 이전에도 반전 시위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양상이 달랐다. ‘전쟁을 반대하는 베트남 참전 용사 모임’ 소속 회원들이 휠체어를 타거나 목발을 짚고 시위에 동참하는 모습은 반전 운동에 힘을 실어 주었다.

1968년 대통령 선거 국면에 있던 미국 정치도 이 여파를 비켜 갈 수 없었다. 미국 민주당 대선 주자 중 인기가 급부상했던 사람은 반전 운동을 지지했던 유진 매카시(매카시즘의 주인공과는 다른 인물) 상원의원이다. 50개 주에서 대선 후보 프라이머리(경선)를 하는 오늘날과 달리 당시에는 13개 주에서만 제한적으로 프라이머리가 벌어졌다.


그런데 뉴햄프셔 주부터 시작된 프라이머리에서 매카시 상원의원이 1위로 부상했고, 존슨 대통령은 4위에 머물렀다. 프라이머리에서 처절한 패배를 맛본 존슨 대통령은 마침내 재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케네디가 암살된 후 부통령으로서 대통령 권한대행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1964년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빈곤과의 전쟁 등 많은 업적을 남긴 그였지만, 인기가 떨어진 상황에서 출마를 강행하는 것은 무리였다.

대선 후보를 확정하는 민주당 전당대회는 그해 8월 시카고에서 개최됐다. 반전 운동가들은 프라이머리에서 1위를 기록한 매카시 상원의원을 지지했다. 반전 운동 그룹과 대학생들은 민주당 전당대회 일정에 맞춰 시카고에서 대규모 페스티벌을 개최하겠다고 선언했고, 시카고 시장이었던 댈리는 이를 불허했다. 그러나 반전 그룹은 1만 명가량 참석한 시위를 강행했고, 시카고 시장은 2만 명이 넘는 경찰을 동원해 무력 진압을 강행했다.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는 험프리 부통령이 대선 후보로 최종 결정됐다. 반전 여론으로 수세에 있던 존슨 대통령과 민주당 내 실력자인 댈리 시장이 막후에서 선거인단에 영향을 미쳤다. 험프리 부통령은 존슨 행정부의 베트남 정책을 계승할 적임자로 낙점됐다.


그러나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후폭풍이 만만치 않았다. 험프리 부통령은 13개 주 프라이머리에 출마하지 않았고, 프라이머리의 대다수는 매카시 상원의원을 비롯한 반전 입장의 후보를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험프리 부통령이 대선 후보로 확정된 데 대한 반작용이었다.


그래서인지 당시 민주당 지지자가 공화당 지지자보다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험프리 후보는 공화당의 닉슨 후보에 맞서 1%도 안 되는 근소한 차이로 패하게 된다. 1968년 대선 패배 이후 민주당은 프라이머리를 50개 주 전체로 확대하고, 전당대회가 아닌 경선을 통해 대선 후보를 결정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한다.

한편 닉슨 대통령은 1969년 11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한다. 반전 여론이 더욱 거세진 가운에 행한 그의 연설은 ‘침묵하는 다수’ 연설로 알려져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반전 피켓을 들고 있는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닉슨은 “소수의 관점에 따라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취임선서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위대한 침묵하는 국민 다수”가 자신의 정책을 지지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가 내놓은 정책은 베트남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무기와 물자를 남베트남군에 넘기고 미군은 단계적으로 철수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정책은 사실상 반전 여론을 정책적으로 수용한 결정이었지만, 그는 시끄러운 소수가 아닌 침묵하는 다수의 이름으로 수용했다. 물론 그 시끄러운 소수에는 반전 시위자들뿐만 아니라 언론도 포함돼 있다. 대통령으로서 시끄러운 언론에 굴복하는 모습보다는 침묵하는 국민 다수에게 호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닉슨 대통령은 이렇게 회고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요인들 때문에 엉망이 됐다. 언론이 전쟁에 대한 국내 여론을 지배하게 됐다. TV 저녁 뉴스와 조간신문은 매일 벌어지는 전투를 보도했다. (…) TV는 전쟁의 참상과 희생자들을 보여줬다. 그런 전쟁 보도의 의도가 무엇이든, 그 결과는 국내 전선에서 심각한 사기 저하였다.” 이를 보면 그가 얼마나 언론과의 관계를 껄끄럽게 여겼는지 엿볼 수 있다.

베트남 전쟁을 기점으로 미국에서 정부와 언론의 관계는 이제 적대적이거나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정상으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더 이상 정부의 보도 자료에 의존하지 않고 탐사 보도와 같은 독자적인 취재를 통해 비밀을 파헤치는 것이 저널리즘의 최고봉으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이 펜타곤 페이퍼와 워터게이트 스캔들이다. 


글 = 김 선 호 

한국언론진흥재단 선임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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