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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운석 병영칼럼] 반려견과 반려묘로 읽는 가족의 변천사

입력 2019. 09. 19   16:43
업데이트 2019. 09. 19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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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운 석 빛바라 대표·여행작가
임 운 석 빛바라 대표·여행작가


어릴 때 ‘쪼리’라는 이름의 개를 키웠다. 녀석이 우리 집에 온 것은 생후 3개월쯤이었다. 혈통이나 품종 따위는 없는 ‘잡종견’이었지만 그것들과 상관없이 녀석은 귀여웠다. 어미 품을 떠난 녀석은 낮에 잘 놀다가도 저녁이면 낑낑대며 울어댔다. 밤마다 녀석을 안고 어르고 달래며 위로했다. 그러는 사이 녀석은 어미에게 의지하듯 나를 의지했다.

2년이 지났다. 녀석은 완전한 성견이 됐고, 짓는 소리도 우렁찼다. 달리기를 좋아하던 녀석은 산책 시간만 기다렸다. 동네 뒷산에 오르면 해방감을 만끽하듯 온 산을 뛰어다녔다. 그러다 휘파람을 불면 뛰어와 내 품에 안겼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쪼리를 더 이상 키울 수 없을 것 같다”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셨다. 팔아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셨지만, 그 뒷말은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날 밤 저녁밥도 먹지 않고 마당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런 내가 이상했는지 녀석은 내 옆에 와서 몸을 바싹 붙인 채 누웠다. 간간이 눈을 들어 내 얼굴을 살폈고 눈이 마주치면 꼬리를 쳤다. 자정이 넘자 이슬이 내렸다. 캄캄한 밤하늘엔 별이 총총히 빛났지만, 내 마음과 몸은 한기에 떨고 있었다. 궁여지책으로 녀석의 집에 들어갔다. 녀석의 집은 판자를 주워다가 내가 직접 만들어 준 것이었다. 내가 제집에 들어와서인지 녀석은 다소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내가 나가지 않고 누워버리자 녀석도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날 밤 나는 녀석을 끌어안고 개집에서 잠을 잤다. 울면서.

3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집엔 두 마리의 고양이가 있다. 이 녀석들은 ‘쪼리’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나를 어미처럼 여기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집사 부리듯 내 앞에서 당당하다. 충성심 따위는 없다. 온종일 창가에 앉아 풍경을 감상하다가 배고프면 밥 달라고 야옹야옹 울어댄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얄밉지 않다. 이름을 부르면 도도하게 고개를 돌리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예쁜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루밍(혀로 털을 고르는 것)하는 모습, 장난감을 갖고 노는 모습, 대소변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모습 등등, 귀여움 그 자체다.

반려견과 반려묘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쪼리’가 전통적인 가족의 모습이었다면 고양이는 현대판 가족의 모습을 닮았다. 그렇지만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개는 개의 습성을 지녔고 고양이도 마찬가지다. 그와 같이 시대에 따라 가족애를 표현하는 방식이 변하고 있다. 과거가 개처럼 집단적이고 동질감과 가족애가 강했다면, 요즘은 고양이처럼 개인적이고 가족애가 약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고양이에게 개의 습성을 요구하면 문제가 되듯 요즘 아이들에게 옛날 가족의 모습을 요구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오늘날 개·고양이는 인간에게 반려의 대상, 즉 가족으로 여겨지는 세태다. 그런데도 서로를 대하는 방식은 다르다. 가족애라는 근본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 표현방식이 변하고 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가족 구성원들에게 모두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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